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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Oct 15. 2019

요가하는 해파리 15

안녕? 가을아

겨울이 곧이라 햇볕을 양껏 쐬어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종일 밖에 있는다 해도 쬘 수 있는 시간이 짧을뿐더러 햇살의 질이 신통찮다. 여릿한데다가 넉넉하지 않다. 되게 짜게 구네, 이런 기분이다. 가을볕은 맛도 양도 딱 알맞아 사람 감질나게 굴지 않는다. 그 여유롭고 너그러운 기운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쬘 수 있을 때 많이 쫴야지.” 


가을 하늘은 높다. 높고 유난히 파랗다. 하얗고 두툼한, 서로서로 이어져있는 구름들. 공기가 밝고 청량하다. 나는 만족한다. 


우리 동네에 수변공원이 하나 있는데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길이 하나씩 쭉 있다. 한쪽에만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해 놓아 질서가 있는 산책길이다. 이 기다란 길을 걷다보면 볼거리, 들을 거리, 만질 거리가 여기저기 걷는 내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오른쪽 어깨에는 까만 줄이 가느다란 인조가죽 가방이. 가방은 얇고 네모나며 가운데에 조그맣게 강아지 얼굴 그림이 있는데 품종은 퍼그이다. 두 손은 가볍게, 샌들에 양말을 신지 않아 발가락이 다 보인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주인공은 아니었고 책에 나오는 여자 하나가 눈꺼풀은 햇볕을 쬘 기회가 없다고 한 말이 생각 나 눈을 감았다. 감았다가, 이따가 또 해야지, 다시 뜨고 출발한다. 


여기 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고양이 가족이다. 나는 고양이 가족을 작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저녁이라 주위는 온통 캄캄했고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딱 들어도 새끼 고양이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왜 혼자 있니? 발목까지 오는 수풀 사이에서 새끼 고양이를 찾아내고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했다. 버려진 고양이는 아닌 것 같고 여기 어딘가에 엄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가까이 다가가 우산이라도 씌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다가가면 새끼 고양이가 무척 겁먹을 거라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버려두고 내 갈길 가자니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있는데 저쪽에서 야옹! 어른 고양이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씩, 웃으며 안심하고는 그제야 발걸음을 뗐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어른 고양이 두 마리,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휙휙 지나다니는 모습을 종종 봤는데 요새는 통 볼 수가 없다. 아마도 다른 데로 이사를 간 모양이다. 


고양이는 못 보지만 개는 참 많이 본다. 죄다 자기 주인이랑 산책을 나온 아이들이다. 걔네 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생김생김도, 하는 짓도, 참 다양하니 보는 재미가 있다. 부러울 정도로 다리가 긴 아이, 지나치게 뚱뚱해서 뒤뚱뒤뚱 느리게 걷는 아이, 네 다리 멀쩡하면서 주인 품에 안겨 가는 개는 어쩐지 눈꼴시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자기 혼자 짖어대는 얘가 있는가 하면, 괜히 지나가는 다른 얘한테 시비 거는 얘는 나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게 된다. 


쟤는 되게 못 생겼네, 저렇게 큰 개를 몇 마리씩이나 키우다니 대단하네, 쟤는 좀 무섭다, 이런저런 감상을 하며 걷는다. 걷는데 저 앞에서 덩치 있는 개 한 마리가 오는데 움직임이 남 다르다. 거리가 좁혀지고, 제대로 보니 양쪽 뒷다리가 불편한 아이였다. 휠체어 비슷한 기구에 뒷다리를 의지한 꼴. 앞다리만으로도 앞으로, 앞으로, 가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씩씩하네! 감동하는 바람에 빤히 보니 지친 기색 하나 없고 눈빛도 단단하다. 사내야 사내. 수컷인지 암컷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라고 단정한다. 길옆에는 내 키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가 야무지게 자라고 있다. 도도하고 당차게. 역시 가을이 좋다고, 눈꺼풀을 감았다가 뜬다. 


여기에는 새도 산다. 흔하게는 오리들이 꽥꽥 물장구를 치거나 아니면 납작하고 큰 돌 위에 너부러져 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리 말고도 흔하기는 하지만 흔하지 않은 새가 있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올 때마다 만날 수는 있지만 그 수가 오리만큼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한두 마리 정도.


  “아, 있다!”


희고 목이랑 다리가 긴 새가 오늘도 어김없이 먹이를 찾고 있다. 하천 중간에 서서 아주 집중하면서. 처음에 보고는 이솝우화의 ‘여우와 두루미’이야기에 나오는 두루미를 생각했는데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중백로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온통 하얀데다가 내가 두 팔 벌려 품에 꼭 안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몸통이다. 운이 좋아 그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내 곁 가까이 쉭익- 하고 지나가면, 깜짝 놀라면서도 울컥한다. 날았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는 것이 생전 처음인 사람마냥 눈을 떼지 못한다.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쉼 없이, 막힘없이, 푸근한 물살. 차분히 듣고 있으면 몸 속 구석구석, 머릿속 가득 파랗게 물든다. 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어? 안녕 하세요?”


되돌아가는 길에 아는 얼굴을 만났다. 우리 동네 헬스장 주인아저씨인데 아저씨도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나랑은 반대방향. 헬스장을 성실하게 다니며 인사를 주고받은 터라 서로 얼굴을 익혔는데, 아저씨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내 고향 친구를 닮았어.”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당시 나는 헤헤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되새겨보니 아저씨는 딱 봐도 60대 중반이고, 그 친구라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닮았다고? 지금 얼굴이? 아니면 옛날 얼굴이? 갸우뚱 했지만 거기서 끝냈다. 더 고민해봤자 뭐......... 


헬스장은 지금은 없다. 아저씨 말이, 그래도 그 자리에서 20년 가까이 운영했는데 건물주가 바뀌면서 이래저래 복잡하게 됐다고 했다. 없어진지는 얼마 전이었고, 그러고 나서 오랜만에 아저씨를 만났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하마터면 모르고 스쳐 지나갈 뻔하다가 뒤돌아 아저씨 등에다 대고 인사했더니 아저씨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어어어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말도 아닌 인사말을 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꾸벅 다시 인사하고 뒤돌았다. 손에는 아까 커피집에서 산 연유 라테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저 앞에 쓰레기통이 보여서 달려간다. 플라스틱이랑 종이컵이랑 분리해서 버린다. 필리리~ 소리가 들려서 보니, 오면서 봤던 피리 부는 남자가 아직도 있었다. 여기서는 가끔 이렇게 무언가를 연습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는데 기타 연습, 노래 연습, 리코더 연습, 춤 연습 등등 부류가 다양하다. 심지어는 없었는데 요즘은 사주를 공짜로 봐주는 할아버지도 생겼다. 사주풀이 연습인지 진짜 활동하시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시지?”


날은 밝은데 달이 보인다. 보름에서 조금 모자란, 희고 통통한 달. 햇볕도 이제 얼마 없고 멀리 보이는 하늘에는 주홍빛 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집에 가자.”


어서 집에 가야겠다. 햇볕도 양껏 쬐었으니 이제는 우리 집에 가서 밥을 먹을 시간이다. 밥을 맛있게 다 먹고 나면 냉장고에는 사과가 있다. 빨갛고 가을 햇살을 듬뿍 담은 사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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