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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Oct 15. 2020

크로#21. 스플4: 메슈트로비치 갤러리에서 만난 욥

스플리트 출신 세계적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 갤러리

스플리트 새벽 어시장과 대구탕

이른 새벽,

실키한 남보라빛을 바탕으로

부지런한 새들 군무로 수를 놓는 중심 축이 된

동네 성당 종탑, 묵묵히 마을을 내려다보 서 있다.

옆집 현지인들은 아직 밤의 터널에 머물러 있는지 기척이 없다.

어제 내려다봤던 이웃집 옥상 꽃망울들

팽팽하게 부풀어 개화 직전이고,

열어놓은 부엌 창을 밀고 들어 온 새벽바람이, 장난스레 커튼을 흔들며 방안을 맴돈다.  

살던 곳 떠나와 맞는 여행지 새벽 공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별한데가 있다.

특히 현지인들의 거주 지역 비집어 묵을때 더 그러하다.

먼 길 달려온 여행자의 감성을 오늘은 또 무엇으로 적셔줄지 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새 날을 연다.      


그사이 짝꿍도 일어났기에, 새벽 장을 보러 나선다.

숙소 골목길 끝자락에 위치한 디오클레티안 성 서쪽, 마르몬토바 거리의 피시 마켓 정보를 어제 호스트에게 확인해두었던 터다.

이른 시간인데도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나와, 어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다.

싱싱한 해산물이 풍성하니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심이 풍선처럼 부풀어간다.

하지만 낼 떠나야 하니 소비할 수 있을 만큼만 구입해야 하므로 눈요기로 대신할 밖에.

평소 잘 보지 못하던 종류의 어종을 비롯, 다양한 해산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겹다.

우리는 커다란 대구와 주꾸미를 사고, 내가 꼭 사고 싶은 대하는 짝꿍이 동의하지 않으니 안타깝지만 돌아선다.

그래도 한국에선 보기 힘든 굵은 씨알 대하에 미련이 남아 자꾸만 시선이 간다. 

왼쪽 새벽 어시장과 마르몬토바 거리.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대구탕과 매콤한 주꾸미 볶음, 그리고 일부는 초고추장을 찍어먹을 주꾸미로 나눠 조리를 시작한다. 다행히 이 부엌 밀가루도 구비되어 있어서 주꾸미 손질이 수월하다.


그녀의 도착으로 드디어 우리 세 사람의 고대하던 성찬이 시작된다.

 대구탕은 우리에게 모처럼 별미가 돼주었다. (2016년에는 우리나라에대구가 잘 잡히지 않았었다)

큰 대구 살을 건져 상대방 국그릇에 넣어주려는 승강이 끝에 국물을 엎지르기도 하고, 주꾸미가 어찌나 싱싱한지 살이 너무 달고 맛있다는 경탄을 주고받으니 심리적 포만감이  먼저 차오른다.

국 담을 그릇이  없어 머그잔에 꾸겨 들어간 큰 대구 토막 모양새가 좀 빠진단 흠 말고는 상차림도 그럴싸하다.


원래 오늘 일정은 흐바르 섬에 갈 예정이었으나 비가 많이 오고 있어서 포기하고 오늘과 내일 일정을 그녀의 정보에 따라 3명이서 동행키로 합의한다.

특히 식사시간에 그녀가 알려준 maps.me 앱은 그야말로 나로선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훌륭한 정보였다. 그간 정보들을 여러 방법으로 저장해두느라 품이 많이 들던 것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이야 더 확장된 기능의 maps.me앱이 여행 필수 앱 이지만 당시에는 우리처럼 더러 모르고 있었다.)

여행은 모름지기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가는 과정다.


이반 메슈트로비치 갤러리

아침을 든든하게 마치고 이반 메슈트로비치 갤러리를 먼저 보기로 한다.

리바 거리에서 서쪽을 향해 바다를 끼고 일직선으로 걸어 1.8km, 도보 30분이 채 안 되는 거리다.

갤러리 정문을 통해 들어가니 뜻밖에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물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넓은 잔디 마당에는 조각품이 자리하고 있다.

갤러리의 웅장함에 연신 놀라며 계단을 오른다.

미술관 전경

메슈트로비치 미술관(Galerija Mesˇtrovic)은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이자 유럽에서도 유명한 이반 메슈트로비치(1883-1962)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기증하여 설립한 미술관으로 1952년에 처음 개관하였다.

가족의 여름 거주지, 전시 및 작업 공간을 위한 빌라로 그가 직접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곳으로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 대신 그의 작품들이 돌아와 있다.

그의 사후, 유족들의 기증물들로 채워진 갤러리는 메슈트로비치의 작품과 함께 그의 후손들의 조각품, 스케치, 건축 평면도 등 약 천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메슈트로비치는 13세 때부터 스플리트에서 대리석공의 제자가 되어 조각 기술을 익히다가 빈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작품을 발표하여 로댕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그 조국 사랑이 드러나는 코소보 신전의 건축을 위하여 무수한 조상(彫像) ·부조(浮彫) ·인신주(人身柱) ·기마상(騎馬像) 등을 만들었고, 이것을 출품한 1911년의 로마 국제미술전에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조각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는 파리, 런던, 비엔나, 로마의 유명 갤러리에 전시를 이어갔으며 약 3,000 점의 풍성한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의 격랑을 피해 가지 못한 그는

한때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얻고 1955년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2.1.16일 생을 마감한 그의 묘는 시베니크 크닌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풍은 대담한 선과 강한 힘을 바탕으로 중세적 장식성의 신비와 슬라브적 웅대함을 나타내어 독자적 경지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은 크로아티아 전국의 마을 광장에서 볼 수 있으며,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 역사박물관 등 위풍당당한 몇몇 건물 설계도 그의 작품이다.           


이반 메슈트로비치 : 스플리트 관광청  사이트 발췌
미술관 입구
갤러리 벽면 부조


미술관 야외 전시물


미술관 돌아보기

미술관은 그의 명성이 말해 주듯 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양한 주제임에도 대부분 인간애로 집약되는 것으로 보인다. 모성을 테마로 한 것도 보인다.

고통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표정 묘사는 보는 이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중 내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욥이었다.

성경 ‘욥기’의 내용은 동방의 의인 욥이 극도의 처참한 불행을 당하자 그의 친구(였던 이)들은 ‘하느님은 전능하고 정의롭다’는 원론적 이유를 들어 ‘불행은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며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백을 주장하는 욥의 주장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 믿는 그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수많은 시련 끝에 하나님은 욥의 무죄를 선고하시고 그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

성경은 의인의 고난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빈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도 않았고 정직하게 증언하지도 않았다고 꾸짖으신다.

성경의 반전이 드라마틱하지만 너무나 강한 시련이 계속되는 ‘욥기’를 읽다가 나는 중도에 포기했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넘어서기 어려운 일들을 되풀이하며 시험하시는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욥의 마음과 이후의 삶이 ‘회복 가능’ 해졌을지에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런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가역적일수 있는 보상이 있기나 한걸까?


저렇게나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해 낸 작가의 생애 이면에는 어떤 고통이 있었을까 역으로 더듬어 본다.

작가 생애에 걸쳐있던 역경은 천재였기에 고뇌의 깊이가 더욱 깊었으리라.


미술관 작품들



전시관을 둘러보고 정문 출입구 옆 의자에 앉아 본다.

작품을 이해해보려 피곤해진 머리를 식히는 휴식의 장소로 훌륭하다.

미술관 아래 내려다 보이는 아드리아해와 그 바다 위를 오가는 배들이 보여주는 풍광이 정말 환상적이다.

갤러리의 나무 울타리 너머에 바로 바다가 펼쳐진 듯한 착각을 준다.

'정말 멋지다!'

 

그새 비는 그쳤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가 설계하고 내부 조각을 제작했다는 근처의 '작은 성당'을 찾아갔다.

대로변 에서 접어드니 비포장이라 땅이 질펀하다.

이리저리 골라 딛으며 출입구로 가보니 문은 잠겨있다.  아쉬움에 바다를 향해 뒤돌아서 있는 건물을 발돋움으로 살피니, 왼편 돌담 너머 작은 종탑이 보인다.

이 성당 내부에는 그가 1917~1958까지 35년 이상에 걸쳐 조각했다는 예수의 생애를 담은 목판조각 릴리프 연작 28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1941년까지 여름마다 이 곳에 왔다는 작가는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마리안 언덕이, 앞으로는 더 없이 푸른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고즈넉한 자연의 품에서 1700년 디오클레티안 궁전의 역사를 지척에 느끼며 영감이 한껏 고양되었을 것 같은 생각을 해보지만 그의 역량을 이끌어 낸 원천이 자연인지 아니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의 受難史였는지는 나로선 짐작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려던 그의 소망과는 달리 2차 대전의 폭풍에 휘말려 몇 개월간의 영어의 몸이 되어야 했던 수난을 겪은 후, 미국 시민이 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남긴 작품들이 그를 대신하여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있다.


오후 일정은 오미쉬로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개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에 가서 오미쉬행 표를 끊은 다음 점심을 먹기로 한다.

아침 식사 후 남은 치즈, 햄, 장아찌를 넣어서

솜씨 좋은 짝꿍이 김 없이 맨손으로 맵시 있게 싼 김밥 점심 메뉴이다.

에 따라오는 따뜻한 국당연히 준비!

마른 표고와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미역국을 끓여 각자의 보온병에 담아왔다. 마른 식재료는 운반, 저장성이 좋아 여행시 비상 반찬재료로 유용하다.

식사 할만한 공원을 찾으러 터미널 뒤로 돌아가니 바로 뒤에 위치한 텅 빈 기차역사가 맞춤하다.

마치 기관사들이 파업을 한 것처럼 통행인이나 직원이 통 안 보이는 게 이상했지만 덕분에 우리 셋은 벤치에 앉아 여유 있게 점심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지에서 맛집을 찾거나 분위기 있는 음식점을 이용하는 것은 분명히 여행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런데 매식을 하다 보면 시간의 균형을 잃을 수가 있다. 패키지는 전세버스로 이동하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지만 자유여행자는 대중교통의 중간 시간들을 식사 시간으로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짧은 여정의 효율성을 그나마 높일 수 있다. 단, 자급 식사는 야외 식사가 가능한 공원이 많은 도시에 한해서이다.

매식과 자급 식사의 횟수나 상황 안배가 여행의 시간 조절과 피로감을 감소시키는 한 요소로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도 한잔 한 다음, 우리는 벽만 돌아 나오면 되는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온다.

오후 일정인 오미쉬행 버스를 타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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