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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n 13. 2023

우울한 날의 내 딸에게

 사랑하는 내 딸에게.


 이제 겨우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 너에게 아빠는 오늘 우울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고 해. 많이 이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늘 해야 할 말은 미루지 말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건 어쩌면 아빠가 하는 일 덕분일 거야.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을 맞닥뜨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못다 한 일을 떠올릴 때는 종종 아주 늦어버리기도 하거든. 그래서 언젠가 결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했던 거고, 오늘은 우울에 대해 말해주려고 해. 길지 않으니까 주머니에 담아 뒀다가 종종 꺼내서 읽으면 좋겠어.


 아빠는 우울이란 걸 잘 모르는 사람이야. 둔해서 그럴 수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덕으로 너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어. 미래의 아빠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플 땐 뭐 내비두면 낫겠지 하고, 배고프면 뭐 아무 거나 만들어 먹지 하고, 외로울 땐 편지 한 장 덜렁 남기고 뭐 여행이나 가지 하는 게 아빠란 사람이야. 우울도 아빠를 보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고 질려서 떠날 거야. 아빠의 기본 마인드는 '뭐든 다 사람 사는 꼴이다'하는 거거든. 뭐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탓을 하지도, 주변 탓을 하지도 않아. 사실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고민과 동시에 적는 편진데, 아마 그게 답일 수도 있겠다. 뭐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빠가 본 우울은 그래.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게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겐 대화가 아닌 원망을, 미워하는 사람에겐 화해가 아닌 저주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운 나 자신에겐 샘처럼 솟는 연민을 쏟아부어. 주고받는 게 아닌 일방통행의 감정이기 때문에 귀먹은 사람에게 점점 크게 소리치듯 진해지지. 원망도, 저주도, 연민도 점점 짙고 탁한 빛깔로 변해서 처음엔 그 우울을 받아주려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고 결국 혼자 남아. 아니면 너만큼이나 고통받고 사는 한 둘, 보통은 부모나 배우자가 옆에 남지. 아빠는 사실 구급차 타면서 그렇게 박살이 난 집을 많이 봤어. 막상 내 일이 되면 어쩌나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무섭다. 정말.


 더 무서운 건 우울이 권투 선수가 주먹을 피하듯이 그렇게 몸을 틀어 피해지는 게 아니란 거야. 우울은 여름날 장판 밑에 스미는 습기 같은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느 날 마음을 들춰보면 곰팡이가 그득인 거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맛있는 음식으로도, 친구와의 수다로도, 어쩌면 진정한 사랑으로도 해결이 안 돼. 그건 나 자신의 문제니까. 아빠 생각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전문 청소 업체의 도움을 받는 거야. 상담을 받고, 약도 처방받아서 먹고. 보통 우울을 치료해야겠단 생각이 드는 건 마음의 병이 깊어진 뒤라서 방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 하는 건 의미 없을 수도 있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응급처치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혈이 된 뒤라야 상처를 꿰맬 거 아니겠니?  그러니까 우선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해. 정신과 상담 같은 건 남의 눈치가 보인다고? 너 꼰대야? 아빠랑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어렸을 때부터 시골서 농사짓는 상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 그 동네 아줌마들은 일이 바빠서 우울할 틈이 없다 그러더라. 그러니까 우울증은 한가한 사람들한테나 오는 거라고. 설마 너도 그런 마인드인 건 아니겠지. 그 사람들이라고 왜 우울이 없겠니. 시골이라고 감기가 없니.


 딸아, 이미 우울하다면 우울이란 놈과 눈을 맞추도록 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요모조모 뜯어보고 무슨 생각을 하나 말도 걸어 봐. 네 머릿속에서 우울을 부풀리지 말고 눈앞에서 마주하면 그 실체가 드러날 거야. 어쩌면 가벼운 우울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어. 우울엔 사는 대로 생각하게 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하는 순기능도 있거든. 세상을 떠난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경증의 우울증 환자들이었을 거야. 너무 억측인가? 아무렴 어때. 그렇게 생각하면 우울이 그렇게 싫지만도 않잖아. 품에 안을 만큼 덩치가 쪼그라드니 좋지 뭐.


 아빠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우울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반대로 우울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걸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아빠는 우울이 괴물이 아니라 병이라고 생각해. 시간을 두고 치료하면 완치되는 병 말이야. 요령이 좋으면 아까 말한 것처럼 (좀 짜증 나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살다 보면 뭐 그런 병도, 친구도 내 인생 어느 한 페이지에 등장할 수 있는 거 아니겠니.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울을 노려보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


 해야 할 말은 미루지 말고 해야 한다라는 게 아빠 생각이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우울에 대한 편지라도 마지막은 이 말로 맺을게. 뭐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니까.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 내 딸.



 2023년 6월 13일

 여름의 문턱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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