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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Oct 30. 2023

보통날의 편지

 딸, 잘 지냈니. 아빠는 잘 지내.


 한 달 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어. 날이 따뜻할 때 시작을 했어야 하는 건데 미루고 미루다가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마당에 달리려니까 너무 춥다. 너랑 살 빼겠다고 약속한 것만 아니면 아마 내년까지 미뤘을 거야. 그래도 꾸준히 달린 덕분에 한 2, 3 킬로는 빠졌어. 운동 시작한 김에 담배도 끊으려고. 엄마는 담배 끊는다고 스트레스받아서 성질이나 부릴 거면 그냥 피우래. 아빠가 매번 그랬으니까. 요번엔 꼭 끊을게. 아빠가 자신과의 약속은 못 지켜도 늘 딸이랑 약속한 건 지켰다는 거 기억하지?


 엄마 우울한 건 이제 많이 나아졌어. 약도 먹고 상담도 받기 시작했거든. 전문가가 확실히 다르긴 한가 봐. 아빠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엄마가 의사 선생님 말이라면 껌뻑 죽어. 책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전에는 필라테스인가 뭔가도 등록했어. 기구를 써서 운동하는 거라는 데 엄청 비싸. 나랑 같이 달리기나 하면 좋을 텐데 돈을 써야 살 뺄 마음이 든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것저것 노력하는 중이라 정신이 없는지 요샌 밥도 잘 안 해. 얼마 전에 아빠 생일이었는데 미역국도 못 얻어먹었어. 그래서 아빠가 끓였지. 아빠가 미역국 하나는 기똥차게 끓이잖니, 네가 좋아하니까. 너 수능 보러 가는 날 아침에도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미역국 끓여 달랬던 거 기억나? 엄마가 시험 보러 가는 날 미역국이 웬 말이냐고 기겁을 했지. 나는 그런 미신 안 믿으니까 그냥 끓여줬고. 맛있게 먹은 덕분에 시험도 잘 봤다고 생각해. 그렇지? 엄마는 교회 다니면서 왜 그런 걸 신경 쓰는지 몰라. 아, 요샌 교회 잘 안 나가긴 해. 안 나간 지 몇 달 됐어. 아빠야 원래 교회 따라가기 싫어했는데 잘 됐지 뭐.


 엊그제 진구한테 전화가 왔어. 전화번호가 안 떠서 처음엔 누군지 몰랐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바로 알겠더라. 사실 목소리 듣기 전부터 알았어. 전화 연결되고 몇 초 동안 아무 얘기가 없었거든. 그래서 아빠가 먼저 말했어. 진구니? 그러니까, 예 아버님. 하더라고. 전화 걸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야. 사실 아빠가 예전에 마지막으로 진구 만났을 때  화를 많이 냈거든. 그게 진구 잘못은 아니었는데 아빠도 그땐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몰랐어. 혹시 아빠가 진구한테 화를 낸 게 마음 아팠다면 미안해. 지금은 나쁜 마음 하나도 없어. 진구가 전화하는 내내 죄송하다고, 그날 거기에 널 데려가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데 오히려 내가 미안하더라니까. 그래서 힘들 때 꼭 연락하라고 했어. 아빠가 잘했지?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려고. 엄마는 아빠를 이해 못 할지도 몰라. 엄마가 운동하는 데 돈 쓰는 걸 아빠가 이해 못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는 주말에 설악산으로 단풍 구경을 가기로 했어. 비가 온대서 걱정이지만 일단 가보긴 할 작정이야. 산에 못 오르면 케이블카라도 타고 오려고. 저녁엔 바다 가서 엄마는 물회 먹고 아빠는 뜨끈한 섭국에 소주 한 잔 할 거야. 비 와도 신나게 놀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무 잘 지내고 있어.


 보고 싶어, 딸.

 사랑해.


 2023년 10월 29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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