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비빈들의 워너비 모자 고고관
고고관
고려시대를 보면 우리나라도 복탁을 썼습니다.
그 이름은 보크타도 아니고 복탁도 아닌.. '고고관'
고려 말에는 몽골과의 국혼으로 원의 공주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콧대 높았던 몽골 왕족 여인들은 자신들의 의복을 고수했었고, 힘 있는 나라의 상류층 의복은 그대로 시대의 패션으로 받아들여졌지요. 그래서 고고관은 몽골의 그것과 똑같은 스타일로 고려의 상류사회에서 애용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의 어머니도, 부인인 보르테(Borte)도, 손자 쿠빌라이(Kublai)의 부인 차브이(Chabi) 그리고 공민왕비였던 노국공주도.. 긴 시간의 흐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여성 중 가장 먼저 고고관을 쓴 여인은 고려시대의 자유부인 '숙창원비'로, 그녀는 원나라에서 고고관을 하사 받고는 감격하여 3일간의 축하파티까지 열었죠. 사랑받고자 노력한 남자 충선왕은 원의 황태후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고고관 하나 보내줄 것을 청하였고, 드디어 도착하여 머리에 쓰던 날에는 큰 연회를 열었으니.. 사신들과 신하들은 양손 가득 예물을 들고 와 축하해 주었습니다. 씐~나는 날이네요.
숙창원비의 남편은 충렬왕과 그의 아들 충선왕이었고, 만난 적은 없지만 관계상 형님도 되었다가 시어머니도 되는 여인이 바로 원나라 세조의 딸로, 처음 원의 공주로서 고려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을 때리는 무서운 여자 '제국대장 공주'였습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었던 이 여인이 처음 온갖 원나라의 풍습을 고려에 그대로 가지고 왔지요. 원나라의 공주들은 남편인 고려왕들보다 더 지위가 높았고, 당연히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원에서도 남자들에게 지지 않았던 성격의 그녀들은 고려에선 더욱 안하무인이었으며 남편인 왕들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남긴 유일한 이는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였죠.
족두리
고려시대까지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던 이 고고관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모양이 점점 작아져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크기로 정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바로 ‘족두리’
족두리는 고려 후기부터 쓰던 예식용 관모로, 조선 초기에는 궁중여인들만 썼으나 가체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대체할 다른 것이 필요했던 사람들로 인해 점차 모두가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옆집 여자의 올린 머리가 더 클까.. 때아닌 큰 머리 경쟁이 일어났던 조선시대, 점점 커지고 화려해지던 가체가 급기야 웬만한 집 한 채에 버금갈 정도가 되고 그 무게를 못 이겨 사망자까지 생기게 되자 영조는 1756년 가체를 금하며 대신 족두리 사용을 권하게 됩니다. 그 후 정조시대에도 여러 번 가체에 관한 사치 금지 법령-조선시대에만 24번-이 내려지죠.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이러한 과한 현상에 대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지고 몰래라도 하고 싶어 지죠.
금지령 이후 사치의 대상은 가체에서 족두리로 바톤터치를 했을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치하지 말라고 나라에서 권유했던 이 족두리에도 우리네 여인들은 경쟁적으로 온갖 금은보화를 달아 장식하기 시작했고, 결국 정조는 족두리에 금, 옥, 칠보 장식을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다시 내립니다.
18세기의 <회혼례첩>을 보면, 결혼 60주년 파티를 열고 있는 노부인의 머리에 장식이 없는 초기 족두리가 얹어있습니다. 크기가 참 크죠. 족두리라기보다 정수리에 중점적으로 올려 모아 고정한 얹은머리 같습니다.
이 비슷한 형상을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속 귀부인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패션은 돌고 돈다고..
14세기 고려 말기 모습이 18세기 조선 후기에 다시 보이는 게 흥미롭습니다.
족두리는 산호, 진주 등의 보석이나 구슬로 장식하기도 했고, 아무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도 썼습니다. 앞에 술이 달린 족두리는 혼인을 위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신부님들 머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지요.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착용했던 족두리입니다. 절제된 장식이 기품 있어 보이는 족두리네요. 솜의 부피감이 느껴지는 게 겹족두리로 보여집니다.
당파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때 서로를 '모기'와 '빈대'로 부르며 당이 다르면 결혼도 하지 않으며 치열하게 싸우던 시대엔 표식을 해야 했던 건지 옷차림도 달랐는데, 노론의 여인네들은 속을 솜으로 채운 '겹족두리'(솜족두리)를 하고 소론은 솜을 넣지 않은 '홑족두리'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득세하는 당파에 따라 족두리의 유행도 왔다 갔다 했다고 하네요.
서양의 공주님 모자’에냉’이 몽골의 공주님 모자 ‘복탁’에서 유래되었다는 건 인류학과 교수 Jack W. 가 몽골의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쓴 저서‘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를 학문적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설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함께 유행했던 앞 코가 뾰족한 신발도 몽골에서 신었던 전통 신발과 비슷하고.. 터번 또한 중세시대 한 때 유럽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걸로 미루어보아 동양의 문화가 유럽으로 건너와 현지화된 것으로 짐작하는 건 그다지 무리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족두리 또한 그 유래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원래 하늘 아래 새로운 디자인은 없고 상호 간 영향을 받아 발달하다 독자적인 특징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특유의 물건이 되고 더 나아가 문화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족두리가 그런 것처럼요.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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