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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작

; 라 뚜왈렛

by MODA


하루의 시작: 라 뚜왈렛

18세기 아침은 ‘라 뚜왈렛{La Toilette}으로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매일 아침 공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등 몸단장을 하며 사교 활동이 전부인 하루를 준비했다. 프랑스어로 ‘화장’ · ‘단장’을 의미하는 라 뚜왈렛은 이르자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위해 준비하는 -머리와 얼굴을 꾸미고 옷을 입는- 과정으로 상류층의 상징이었다.

아침에 옷을 감싸두었던 직물을 테이블 위에 펴 몸단장을 했던 옛 관습에서 시작된 뚜왈렛의 용어 자체는 중세시대 옷을 감싸 벌레와 먼지로부터 보호하는 데 사용된 투알{Toile(캔버스, 베)} 또는 리넨 직물에서 유래했다. 이후 17세기엔 화장품 등 치장하는데 필요한 물건 -세면도구, 빗, 크림, 파우더, 향수, 액세서리 등- 을 올려놓는 테이블보를 의미했다. 18세기에는 이 모든 것들을 올려놓는 가구를 지칭하기도 했던 '라 뚜왈렛'은 몸을 단장하는 행위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흥미로운 건 이 준비 과정이 사람들 앞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라 뚜왈렛, 18세기


16세기부터 행해진 뚜왈렛은 17세기 루이 14세와 함께 궁의 정교한 의식*으로 발전하여 왕족을 비롯한 귀족 계급 남녀 모두의 일과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뚜왈렛은 그저 외모를 치장하는 것이 아닌 위생을 보완하는 일이기도 했다.

17세기에도 여전히 각종 병에 취약해지게 만든다는 오해를 받았던 물에 대한 공포와 불신이 남아있었다. 15세기 후반엔 매독이 창궐했고 여전히 페스트는 유럽 곳곳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높았다. 물에 대한 공포로 위생은 ‘향수와 알코올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거나 옷을 여러 번 갈아입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얼굴이나 손은 물로 씻기도 했지만 바로 말려주는 것이 권장되었다. 당시 의학계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모공이 열려 병균이 침투하고 장기를 부패시킨다고 믿었다.** 목욕을 한 후에는 몸의 회복을 위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할 것이 권장되었다.


목욕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해롭다.
목욕은 몸을 기진맥진하게 하고
공기 속 나쁜 것들의 영향을 받기 쉽게 한다.

- 르노도{Théophraste Renaudot(루이 13세의 의사)}



* 왕의 뚜왈렛에 참석하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었다. 친지, 고위관리 등 최측근들과 하인들을 포함에 일반적으로 100여 명의 궁정인이 이 아침의식에 참여했으며, 모두 남성이었다.

** 당시 사람들이 목욕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온수 목욕은 청결이 아닌 주로 치료의 목적으로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목욕을 했다. 중세시대까지도 마을에는 공중목욕탕과 사우나가 흔했지만, 16세기에는 급격히 그 수가 줄어들다 거의 사라졌다. 14세기 중반 유럽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주된 원인으로 공중목욕탕이 꼽혔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에겐 목욕을 하면 몸이 약해져 병에 걸리기 쉽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목욕은 청결보다는 즐거움을 위한 형태로 상류층에서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상류층은 아침저녁으로 알코올이나 식초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아주었고, 하루에 최소 다섯 번 이상 리넨속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위생보다 청결해 보이는 겉모습이었기에 화장과 향수 그리고 목과 손목에 보이는 깨끗하고 하얀 리넨에 집착했다.

여기에 더해 머리와 눈, 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시대가 추구하는 미였기 때문에 화장수로 얼굴을 닦아내고 기름기 가득한 머리는 하얀 파우더로 가렸으며,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는 등 이 모든 행위는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루틴으로 자리잡았다.

자연스레 귀족의 라 뚜왈렛은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세련된 생활 방식으로 여겨지며 하나의 의식처럼 행해졌다.


니콜라 랑크레, 하루의 네 시간: 아침, 1739, 런던 국립 미술관


상류층 삶의 호사스럽고 여유로운 삶을 반영하는 이 의식은 사실 진짜 막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일과가 아닌, 준비하는 그 과정조차 신중하게 연출된 허세와 과시적인 행위였다. 내실에서 귀족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의도적으로 여유롭고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손님은 라 뚜왈렛의 마지막 손질단계에서 초대되어 '안 꾸며도 멋진 나'를 연출해 보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는 도자기, 조각품, 중국 티 세트와 같은 값비싼 수입품을 무심한 듯 배치해 부를 과시했고, 그 속에서 부인들은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는 않았지만 매혹적인 차림새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림 속에서 여인들은 때론 맨살이 드러나있지만 감추려는 기색은커녕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여유롭게 대화를 하고 차를 즐기며 그들만의 친밀함을 나누고 있다.


내밀한 라 뚜왈렛, 18세기


귀족 남녀 모두의 의식이었던 라 뚜왈렛은 18세기 중반 이후 점차 여성만의 관습이 되었고, 이러한 여성들의 사적인 순간은 예술의 흥미로운 소재가 되어 화가들은 '라 뚜왈렛'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당시 유행으로 번진 내실의 이러한 모습을 그린 초상화 또한 상류층의 특권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지위 상승을 원하는 부르주아들이 의뢰하면서 라 뚜왈렛은 회화의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화가들은 점차 은밀한 순간을 몰래 보는 듯 자극적이고 관음적인 스타일로 그려냈다.



권력의 뚜왈렛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의 라 뚜왈렛이 이루어지는 내실은 남성이 기대하는 ‘매혹적인 여성이 미를 가꾸는 과정’ 임과 동시에, 남성이 경계하는 ‘여성의 야망이 실행’되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었다. 여인들의 사적인 공간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행해졌던 뚜왈렛은, 왕실의 정부와 함께 공적인 행위가 되었다. 매일 아침 몇 시간 동안 행해지는 퐁파두르 부인의 라 뚜왈렛 풍경은 매우 흥미로웠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0, 포그 미술관


자신이 디자인한 아름답고 매혹적인 실내 가운을 걸친 채 우아하게 새끼손가락을 들고 붓으로 연지를 바르는 과정 중에 포착한 듯 연출된 초상화는 여인의 제스처, 달콤한 파스텔 톤의 색감과 꽃, 리본, 깃털 퍼프 모두 로코코의 표본 그 자체를 보는 듯 몽글몽글하다.

왕에게 닿는 가장 빠른 비공식 통로였던 퐁파두르 부인의 화장대 주위에는 궁중의 고위 인사들과 외국 대사들이 서서 그녀가 단장을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차를 마시며 가볍고 재치 있는 대화가 오갔고, 퐁파두르는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박식함을 드러내며 때때로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곳에서 퐁파두르는 정치가나 왕실의 신하들을 사적으로 만나거나, 각국의 대사들과 비공식적으로 외교를 논의하고 협상했다. 하지만 퐁파두르는 언제나 선을 지켰다. 협상을 위해 테이블에는 앉았지만 그 이후의 절차는 남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퐁파두르의 뚜왈렛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사회적 특권이었다. 그녀의 뚜왈렛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된 여인들은 드레스, 화장품, 붓, 부채, 테이블 도구, 가구 등 퐁파두르 부인의 모든 것을 따라 하기 위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부적인 부분까지 관찰했다. 퐁파두르가 입고 쓰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쉬크하고 핫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 또한 드레스와 사용할 물품들을 세심하게 고르고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아침의 일과를 수행해 냈다.


루이 15세의 얼굴 카메오가 달린 진주 팔찌 / 블러셔


이 초상화는 루이 15세와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유일한 초상화이기도 하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얼굴 카메오가 달린 진주 팔찌를 찬 오른쪽 손목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격식 있는 환경이 아닌 은밀한 내실에서 왕의 얼굴을 자신의 몸에 착용하여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는 왕과 친밀한 관계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암시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퐁파두르 부인의 분홍색에 대한 사랑은 유명했는데, 분홍색은 그녀의 시그니처 색상이었다. 왕을 유혹할 때에도 핑크 드레스를 택했으며, 그녀의 볼은 항상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녀의 드레스는 수많은 핑크리본으로 장식되었다. 연지를 바르는 화장도 즐겨했다.

당시 볼에 연지를 바르는 화장법이 매우 유행했는데 연지에 대한 프랑스 여인들의 집착적인 유행을 이끌어낸 장본인이 바로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장밋빛 뺨과 짙은 눈썹’은 당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다. 여인들은 순결, 순수, 겸손을 상징하는 하얀 분을 칠해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었고 머리에도 밀이나 쌀가루를 뿌려 하얗게 만들었다. 하얀 피부에 대조적으로 보이는 붉은 뺨은 시대의 미적 포인트가 되었다.


붉게 물든 뺨

여인들의 볼 화장 / 블러셔 키트, 18세기


붉은 뺨 권력이었다.

사람들은 눈 밑에서 바로 시작되어 뺨 전체가 붉게 물든 모습이 진짜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러한 모습이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그을리고 빨개진 게 아닌 희고 고운 피부에 생기가 돌아 붉게 물들어 한가로운 삶을 나타내주는 즉, 부나 계급의 표식이었기 때문에 선호했다. 프랑스 여성들은 1년에 200만 통의 연지를 사용했고, 연지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상류층을 따라 하려는 평민이나 가난한 여인들은 볼에 적포도주를 바르기도 했다.


마차의 바퀴처럼 크게 칠하고
빰에 홍역이 걸린 듯 흉내 내라.


- 1759년 프랑스 패션지침서


퐁파두르 부인은 연지를 너무 좋아해 완벽하게 바르지 않고는 절대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연지에 대한 사랑은 레슈친스카{Maria K. Z. F. Leszczyńska}왕비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당시 왕비의 시녀인 ‘담 뒤 팔레{Dame du palais}’는 유서 깊고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의 귀족 여인들에게 주어지던 영예로운 자리였다. 퐁파두르는 애초에 될 자격이 없는 자리였고 그녀 자신 또한 시녀로서 왕비의 곁을 지킬 생각도 없었지만, 왕실에 남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그녀는 온갖 로비와 공작으로 자리를 꿰찼다. 퐁파두르의 이러한 태도에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며 마지못해 그녀를 시녀로 받아들였던 왕비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앞으로는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시녀로서의 품위를 위해 화장과 호화로운 드레스를 지양하도록 지시했다.


'로코코의 표본',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6, 알테 피나코텍


하지만 자중하라는 왕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직책을 임명받는 성스러운 자리에 보란 듯 더욱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퐁파두르 부인의 볼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는 공개적으로 왕비를 무시한 처사로, 베르사유는 충격과 놀라움에 빠졌다. 사람들은 그만큼 궁정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었다. 온 궁정이 이 스캔들로 떠들썩했지만 퐁파두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원하던 목적달성에 흡족해하며, 시녀가 된 기념으로 화가 부셰에게 초상화를 의뢰해 로코코의 표본으로 남은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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