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인가 적군인가?
문득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독서와 쓰기의 영역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다른 차원”이란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없는 표현입니다. 다만 독서 고유의 목적보다 책 읽기가 하나의 수단이 되어 가는 모습에 조금 낯섭니다. 격세지감 정도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네요.
저는 백곡 김득신을 존경합니다. 천연두를 앓아 둔재에 가까웠지만 그의 아버지 김치의 부단한 사랑과 노력, 격려는 아들에게 특별했습니다. 다독왕 김득신은 책을 읽으면 1만 번 이상 읽고, <사기열전>의 “백이전”은 11만번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늘그막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위대한 시인이자 선비로 조선시대를 빛낸 인물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김득신을 자주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아버지 김치의 부성애를 보며 자주 반성했습니다.
독서의 유용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는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필요에 따라 발췌해야 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냥 읽습니다. 트렌드와 맞지 않는 비효율적 독서가입니다. 차곡차곡 메모를 해뒀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뭐 아무튼 그냥 책의 느낌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읽었네요. 그러다 보니 완벽한 워딩을 활용하기보다 체화시켜 하나의 줄기가 뻗어나가도록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독서의 방식과 효용성은 늘 이슈라는 점입니다. 독서는 무척 좋은데 독서의 결과를 당장 확인해야 하고, 그 결과가 학습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독서도 낭비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쓰기의 본질을 인정합니다. 쓰기라는 행위가 주는 삶의 파급력은 놀랍습니다. 단순히 생각만 하거나, 독서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쓰기와 삶을 연결시키는 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이유로 “별을 보며 글을 씁니다”를 연재했습니다. 그런데 독서가 주는 고유의, 어떤 내밀한 작용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능성의 가치를 묻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보문고에 가려고 광화문 거리를 걸으면 다른 목적 때문에 동일한 거리를 걷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 책들에 둘린 공간도 좋고, 직장인들이 잠깐의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책이 주는 특유의 정서라는 게 있지 않을까요. 책장을 넘기거나, 표지를 매만질 때 나오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독서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콩쿠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피아노를 사랑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독서를 하면 글을 써야 하고, 그 글의 수준이 항상 상향곡선을 이뤄야 한다면 독서가 감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아이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청소년 문고 6권을 읽는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3월이면 4학년이 되지만 12월 말일에 태어났으니 사실상 3학년 나이입니다. 담임선생님과 친구들, 친구들의 부모님에게 착하고 똑똑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독서가 학습과 연계되어야 하는 시점에 가까울수록 자녀의 독서습관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참고로 제 아들은 무언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글짓기와 독후감 과제도 간신히 해가는 수준입니다. 분명 최고의 독서전문가들은 인풋이 있으면 반드시 아웃풋이 있다고 약속하는데 혹시 우리 아이만 비껴가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평범한 아빠에 불과해 언제쯤 독서를 통한 유의미한 아웃풋을 기대할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아들이 제 노트북에다 뭔가를 적기 시작합니다. 뭐하냐고 물었더니 소설을 쓴다네요.
정말 이해 안 되는 게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스스로 소설을 쓴다는 게 저로선 놀라웠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했거나 특별한 주제가 떠올라 갑작스럽게 쓰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뭔가를 쓰는 모습을 보니 흥미로웠습니다. 그게 무의미한 끄적임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학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저는 그 모습을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는 독서를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아이의 독서를 방해하는 요인이 많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부모인 제가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음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치사해지고, 조급해집니다. 그럼에도 저 자신보다 책의 위대함을 믿고 싶습니다. 제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을 책이, 적어도 독서가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다고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김득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반성하고 도전받는.. 그런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