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리와 너구리 그리고 삼룡이
유년시절에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표지와 내용만은 잊히지 않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어느 날 한 소녀가 영주에게 시집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엔 결혼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읽고 또 읽다 보니 그냥 단순한 결혼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주와 가난한 소녀의 신분은 차이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벚꽃이 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저는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아름다운데 참 슬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읽은 엔도 슈샤쿠의 <침묵>에서 다음의 구절을 만났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현실이 빚은 찬란한 아픔의 대비가 가슴에 콕 박힌 순간, 어릴 적에 읽은 시집가던 소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떠듬떠듬 흐릿한 기억에 불이 켜지자 이야기의 전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깊숙이 박힌 큰 못처럼 세상을 사는 인간은 생래적 슬픔이 있고, 그 찌릿한 아픔이 오랜 시간 내재한 까닭에 이야기들이 가시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걸 말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이가 네 살 정도 되었을 겁니다. 불 꺼진 방에 아들과 누워 책을 읽어줄 수 없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오리, 너구리, 삼룡이 세 친구들의 에피소드입니다. 가오리는 까칠하고, 삼룡이는 착하고, 너구리는 럭비공 같습니다. 이야기는 항상 “가오라~~~”로 시작합니다. 새벽에 가오리의 집으로 찾아가 같이 놀자는 삼룡이와 너구리의 끈질긴 구애? 에 투덜대지만 재미있게 어울리는 설정입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크고 작은 이슈에 따라 저도 모르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이 문제가 되면 무서운 늑대를 출연시켜 친구들을 위협합니다. 먹거리 이슈가 터지면 신장개업한 중국집 사장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능청스럽게, 때론 표독스럽게 캐릭터를 꾸미는 식입니다. 무엇보다 우정과 다툼도 이야기의 핵심 테마였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면, 가오리가 살던 심해에 가기 위해 장비를 만들어 가까스로 다녀온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주제가 있습니다. <슬픈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게 끔 크리스마스 전날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가오리와 너구리 그리고 삼룡이가 장난감 가게에 갑니다. 선물로 받고 싶은 장난감들을 구경하던 친구들은 자기 부모님께 사달라고 할 거라며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데 그 동네에서 유명한 가난한 아이가 거리를 배회합니다. 아이는 차마 상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밖에서만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퍽이나 슬픈 대비입니다. 아이의 시선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상점 내부에 고정됩니다. 먼저는 갖고 싶은 장난감에, 그리고 곧 희망찬 아이들의 눈으로 시선은 이동합니다.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서로 다른 시선들의 온도는 조금씩 격차가 더해갑니다. 상점 주인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특수를 맞아 한껏 기분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 차분해진 할아버지는 포장작업대에 앉아 몰려들 때를 준비하고자 장난감을 포장합니다. 한참을 포장하다가 거울에 비친 상점밖 풍경을 보게 됩니다. 여전히 밖에서 머물던 가난한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며, 귀엽게 움직이던 장난감을 좇았지만 할아버지의 눈은 거울 속에 담긴 아이의 시선을 향합니다.
크리스마스 아침, 예상대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장난감 상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밖엔 예상대로 어제 그 아이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바쁜 가운데에도 아이를 확인합니다. 역시나 아이는 어제부터 바라봤던 장난감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그때 문이 열립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머뭇 거렸지만 할아버지를 따라 상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해줍니다. “네가 갖고 싶은 걸 말해줄래? 이 할아버지가 선물해 주마.”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으며 말합니다. “저, 로봇이요. 제가 가질 수 있을까요.”
예상하신 것처럼, 할아버지는 미리 포장해 둔 로봇을 아이에게 건넵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귓속말을 해줍니다.
“어제 네가 한참을 들여다본 게 이 로봇 맞지? 아이야, 잊지 말고 꼭 기억하렴. 사람은 원하는 것을 시선에 담고, 결국은 시선에 담긴 그것을 갖게 된다는 걸.”
이 모습을 본 가오리와 너구리, 삼룡이는 교훈을 얻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아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저도 감정이입이 되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울먹였네요.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해준다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형식과 캐릭터, 설정을 어느 정도 맞추고, 드라마의 회차를 늘려간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를 해주는 게 크게 어렵진 않습니다. 저는 <가오리와 너구리, 삼룡이> 이야기를 7년 가까이해줬습니다. 유치원 전까지는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초등학교 입학 후엔 일주일에 2~3회 30분 정도로요.
팍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이야기는 힘이 셉니다.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아이들에게 이야기는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편에서 다시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