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앞에 세워주세요.
아들이 입학한 인도학교는 널서리(유치원 이전 단계)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 학교였습니다. 한국에선 엄마가 등원을 도왔는데 인도에선 스쿨버스 또는 따베라(SUV)를 이용했습니다. 인도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어와 힌디(인도어)를 무자비하게 섞어 말하는 수업을 연말생 5살 남자아이가 들어야 했으니 자기도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학교에 막 적응을 할 무렵에 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인도학교는 정기적으로 PTM을 진행합니다. 학부모와 교사 만남인데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법 진지하게 묻고 대답하는 형식의 미팅입니다. 현장에 오신 부모님들을 보면 한껏 멋을 내고 신경 쓴 티가 역력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입니다. 교육이 인도인들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학교에 갈 때면 아이에 대해 묻고 조언을 들었습니다. 대부분 긍정적인 피드백이었기에 마음이 좋았습니다.
문제는 마지막으로 전학한 학교였습니다. 무섭기로 유명한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큰 박스에 아이들을 가두거나, 손발로 때린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들이 부모가 보는 앞에서 학생의 머리를 잡거나, 뺨 때리는 걸 자주 봤습니다. 인도에선 흔한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한국 학부모들이 그 선생님에게 여러 차례 항의한 바 있었습니다. 자녀를 때리지 말라는 각서까지 받았으니 보통은 아니었겠죠. 널서리를 지나 KG(유치원) 클래스에 올라간 아들이 반 배정을 마쳤는데 하필이면 그분이 담임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조언이 이어졌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처음부터 각을 세우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선 그 나라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아이를 바닥에 앉혀둔 선생님이 발로 밟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감선생님을 찾아가 20분 정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이야기했지만 벽을 느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문장이 잊히질 않습니다.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조금기다리면 내 얼굴 안 봐도 되니까, 그때까지 당신이 참아요.”
그렇게 길고 긴 KG를 마치고 아따쉬 바쑤라는 선생님을 만나 1학년, 2학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무척 어려웠지만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기억도 좋게 남았고, 아내의 노력 덕분에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타국에서 사는 게 어려웠습니다. 아들은 더했겠지요.
그런데 아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런 시간도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다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들이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는가 생각하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부모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자라날 소중한 시간을 자주 침범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부모의 약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도에서 물소 떼와 염소 떼가 지나가는 광경을 매일 지켜봤습니다. 제가 목격한 목자들은 행렬의 맨 끝에서 앞서가는 가축들을 살핍니다. 저들을 잘 이끌려면 맨 앞에서 꼼짝 말고 따라오라고 겁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없이 맨 뒤에서 따릅니다. 가축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다가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크게 소리 질러 다시 대열에 합류시키는 방식입니다. 손끝 하나 건들지 않고 참 탁월하게 이끌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목자에겐 고작 얇은 스틱 하나가 있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시간, 몸이 자라는 것처럼 마음과 생각이 자랄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모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생은 빗발치는 오답을 뚫고 정답을 향해 가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부모가 매번 정답을 손에 쥐어주면 아이들에겐 수많은 오답 앞에서 방황하는 수순만 남았다는 뜻이겠지요. 부모인 저에게 자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먼저 제 자신을 돌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