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님 만세
미술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필체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한 번 굳어진 감각을 다시 돌려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관찰력이 나쁜 편입니다. 그런데 벽, 사물의 무늬, 사물의 표면 등을 보면 갖가지 표정, 얼굴, 몸의 형체와 같은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그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면 미켈란젤로처럼 천장을 덮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웃습니다.
중학교 때 일입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올림픽공원의 조형물을 보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음 미술시간이 되어 책상 위에 각자의 그림을 올려둡니다. 선생님이 교실을 돌며 일일이 검사합니다. 그림을 평가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지만 검사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대체할 단어가 보이지 않네요. 드디어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셨습니다. 스케치북을 바닥에 던지신 후 뺨을 때려 꼼짝없이 얻어맞았습니다. 장난을 친 건 아닙니다. 제 딴에 최선을 다해 그린다고 그렸는데 그런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 일로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그림 그리지 말자.”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이자 아내입니다. 어느 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줬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라고 말이죠. 당시에도 제 그림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을 벗지 못했습니다. 스케치북 앞장에 그림 열심히 그리라는 메시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저는 당시 상황을 마치 숙제처럼 느꼈습니다. 문득 중학교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서점에 가서 미술 관련 책을 구입했습니다. 그림을 보며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랐습니다. 진지하게 그렸는데 제 눈엔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그림을 본 몇몇 분들이 그림을 달라는 부탁에 스케치북에서 그림을 찢어 드린 후 마지막 남은 그림입니다.
한 권의 책을 많이 읽으라는 조언과 다양한 책을 읽히라는 조언이 너무 많아 오히려 헷갈립니다. 중요한 건 자유롭게, 재미있게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보와 지식을 담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데 있겠지요. 이 간극이 기계와 인간의 질적이며 극적인 차이입니다. 질문이란 단순히 모르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정형화되고 구조화되어 이미 게임 끝난 것들에 다시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스탠스를 분명히 하겠다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내가 납득하기 전까지는 경계에 머물겠다는 뜻입니다.
대단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권위를 빌어 인용하는 행위는 글을 풍성하고 안전하게 해줍니다. 논문은 정확해야 하고 또 정확합니다. 그래서 그게 다입니다(물론 모든 분야가 그렇진 않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창의적인 분화는 일어나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대학원 때 일입니다. 적은 인원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매시간 소논문을 작성해서 평가받고 토론하는 수업이었습니다. 토론은 학생과 교수 가리지 않고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난상토론 결과, 학기를 마치고 98점 만점에 98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쓸 때마다 칭찬과 질책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창의적이지만 각주를 달아서 오라는 겁니다. 논문이기에 형식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다시 말해, 교수님의 지적은 네 생각 말고 검증된 저자의 의견에 저의 생각을 맞추거나, 숟가락을 얹거나, 권위에 기대라는 뜻입니다.
각자가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제 기준에서 지성인은 한 사람입니다. 고인이 되신 이어령입니다. 그의 글은 판단받지 않습니다. 그의 글은 오직 이어령 자신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세상에 없는 개념을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같은 글은 논문에 익숙한, 그러니까 책을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는 목적으로 읽는 사람은 절대 쓰지 못할 글입니다. 쓸 수 없으니 말할 수 없고, 말하지 못하니 평가는 더더욱 할 수 없는 것이겠죠.
저는 아이들이 이성적 기능을 연마할 책을 읽기 전에 뜨거운 워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성을 길러주는 책입니다. 바른 인성에서 고도로 지적인 합리성이 생겨납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상대적으로 비도덕적인 사람보다 더 이성적일 확률이 높습니다. 도덕과 윤리란 집단이성의 합의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한 사람이군.” 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기후열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럽(전 지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에 비해 비닐 및 플라스틱 사용이 월등히 높습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과 인식된 상황을 조절할 줄 아는, 다시 말해 인내할 줄 아는 자기 의지에서 비롯합니다. 그런데 앎과 실천이라는 두 축은 이성이 아니라 인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에 걸린 그 일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알지만 못하는 겁니다.
어린이, 청소년기에 충분히 인성이 길러지지 않았는데 이성에 집중된 교육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의 경우, 왜 어른동화가 필요한 걸까요. 일시적인 감동이나 자극을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인성의 부재가 개인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뉴스에 비친 어른들은 많은 경우, 이성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사명감으로 자신의 직무를 다한 영웅들에 의해 아주 작은 균열이 일어나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자기 계발에 열광하는 시대입니다. 자기계발서적이 아니면 책도 아닌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타인계발서는 왜 없는 걸까요? 자기 존중은 외부에서 안으로 유입됩니다. ”나를 사랑해야지, 나를 존중해야지, 나를 아껴야지, 내게 선물해야지. “ 와 같은 ~해야지 라는 행위의 방향이 그걸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존중하는 것에서 기인한 자기계발이 확장된 개념은 타인계발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외부에서 안으로,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으로 방향이 지속되는 것이니까요.
인성이 부재한 이성 위주의 교육이 갖는 한계가 더욱 도드라지는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따뜻한 이야기, 영혼에 울림을 일게 만들 이야기, 아픔에 눈 감지 않게 해 줄 이야기,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와 어떤 진실이 있음을 깨우쳐주는 이야기,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 용서의 가치를 잔뜩 품은 이야기, 실패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Outstanding 도 중요하지만 Understanding 은 더욱 필요한 세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