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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쌤 Nov 02. 2024

허수아비가 없었다

올 가을 우리 논엔 허수아비가 없었다. 아빠도 없었다.

항상 허수아비가 먼저 떠올랐다. 

우리 집, 우리 아빠, 우리 논, 옛날에, 어렸을 때는 하고 뭔가를 떠올리면. 마치 봄 하면 꽃이 떠오르고, 겨울 하면 눈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다 헤어진 밀짚모자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 허수아비. 어쩌면 옷을 '입고' 있다기보다는 '걸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허수아비는 국민학교 다니던 그전부터 계속 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서너 살 때나 그 보다 더 오래전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나라고 알아챘던 그때부터 기억 속에 있던 허수아비, 허수아비...  


처음부터 허수아비에 대한 나의 감정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허수아비를 좋아했다. 내가 허수아비보다 한참이나 작던 시절, 당당하게 낮이나 밤이나 우리 논을 지키는 허수아비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비가 오면 비에 젖는 허수아비가 불쌍하다며, 눈이 오면 허수아비가 춥다며 우산이고 입고 있던 옷이고 아빠에게 줬다. 우리 허수아비 더 따뜻하게 해 주라며 아빠에게 떼까지 쓰며 울던 나였다. 어쩜 허수아비는 동생도 사촌도 없던 나에게 동생이기도 했고 사촌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서 요즘은 참새들이 너무 똑똑해져서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친구들과 그렇다 아니다 하며 입씨름을 했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 높여 친구들에게 정말인지 아닌지 직접 우리 논으로 와서 보자고 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나는 친구들 몇 명과 우리 논 근처에 몰래 숨어서 허수아비를 지켜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참새들이 날아왔다. 그런데 정말이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허수아비의 어깨와 머리에 날아와서 앉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충격이라니! 언제나 우리 집 논의 소중한 벼를 지켜줄 것이라고 철통같이 믿었는데, 그 믿음이 송두리째 박살 난 것이다. 그것도 친구들 앞에서...


그럼 그렇지.

야, 내 말이 맞지?


친구들의 비웃음과 놀림은 덤이었다.

못된 참새떼처럼 뭉쳐서 재잘거리며 돌아가는 친구들 뒤로 나만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이내 한달음에 인근 논에서 일하고 있던 아빠에게 달려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수아비  갖다 버려!

, 참새들 하나  쫓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아빠 앞에서 한참을 울고불고했다. 그러다 그만 지쳐 아빠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나를 업고 가며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계속 "알았다, 알았다"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변함없이 우리 집 논에는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다시 며칠을 울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빠는  듣지를 않으셨다.


그날 이후 난 허수아비가 싫어졌다.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왠지 도둑이 들어도 짖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겁쟁이 개를 키우는 것 같은, 바로 앞에 있는 생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참새를 쫓지도 못하는 허수아비라니...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친구들에게,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아니 이제 그냥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난 두 번 다시 허수아비를 내 마음속에 담지 않았다.


올해 들어 아빠가 아팠다.

나이도 나이지만 엄마도 없이 혼자 딸자식 키우려고 밤낮없이 평생 농사일 하며 마음 고생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아빠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를 받다 가을 들어 입원을 했다. 그래서 올 가을 내내 우리 논에는 허수아비가 없었다.


아빠 병원에서 돌아왔다.

아빠 갈아입힐 옷가지를 몇 벌 챙기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던 담당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아빠는 용케 지금껏 잘 버텨오고 있지만 극적인 회복은 어려워 보였다. 나를 비롯해 담당 의사나 주변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선뜻 말하기만 조심스러운 상황일 뿐이었다. 그러다 오후에 병실을 나설 때 우연히 회진하던 담당의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건넨 말이었다. 그래, 이런 게 인생이지하며 스스로를 말했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했다. 아빠 옷을 챙기고 나도  옷을 갈아입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옷을 '입고' 있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옷을 '걸치고' 있어 보였다.


. 수. 아. 비.

허. 수. 아. 비.

갑자기 그동안 잊고 있었던 허수아비라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아빠를 지켜주고 있나? 내가 뭔가를 하고 있나? 지금껏 살면서 날 지켜준 아빠를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뭔가 해줄 수 없는 나. 어쩌면 내가 바로  허수아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빠는 왜 지금까지 다 낡아빠진 오래된 허수아비를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딸자식이 허수아비 때문에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그렇게 며칠을 울면서 난리를 쳤는데... 천성이 농사꾼인 아빠는 당연히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허수아비로는 우리 논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참새 한 마리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왜?


문득 허수아비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거울 속의 나에게서 눈길을 돌려 옷을 대충 걸치고 집 밖 창고로 향한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껏 한 번도 아빠 없이 나 혼자 들어가 보지 않던 작은 창고. 스스로 문을 열어 본 적도 없던 창고.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지와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이미 오래전  이가 다 빠진 호미며 낫과 같이 지금 당장 갖다 버려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 아빠는 왜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두었을까 싶은 것들 투성이다. 창고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어보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석 쪽 깊숙한 곳을 보니 밀짚모자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허수아비다!

항상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바로 그 허수아비였다. 조금 망설이다 두 팔을 한 껏 뻗고, 허수아비를 흔들어 봤다. 이윽고, 두 팔을 더 벌려 조심스레 안아서 꺼냈다. 아빠는 이 덩치 큰 허수아비를 용케 잘도 포개 넣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의 내 키만큼 큰 허수아비. 기억 속의 허수아비는 내 키 보다 훨씬 더 컸던 것 같았지만. 허수아비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허수아비를 내려놓았다. 허수아비는 이제 창고 한가운데 누워 있다. 누더기 같은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누더기는 아니었다. 낡은 옷이기는 했지만. 내가 왜 이걸 궁금해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잘됐어.


이 참에 갖다 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낡은 허수아비의 옷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던 순간! 이 옷은?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오래전 돌아가신 엄마의 옷이다. 국민학교시절 내내 내 기억 속에 엄마가 입고 있던... 그 시절 학교 미술시간에 엄마를 그릴 때면 늘 그렸던 그 옷. 그 옷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순간 눈시울이 찡해져 왔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순간,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엄마를 만날 줄은 몰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고!" 하며 허수아비의 옷, 아니 엄마의 옷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옷의 소매 쪽에 또 다른 옷이 만져진다.


이게 뭐지?

허수아비의 소매를 살짝 거둬보니 어린아이의 옷이 허수아비의 팔 쪽에 또 입혀져 있다.


이건! 내 옷이다.

아마도 서너 살 때 입었던 옷. 어렴풋이 생각해보면 가끔 내 옷 어딨어하며 아빠에게 투정을 부렸던 그 옷.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젠 작아서 못 입는다고 하던 아빠의 말에 아니야, 아니야 하며 찾아 달라고 했던 바로 그 옷!


아빠에게 허수아비는 무엇이었을까?

덩그러니 창고 한가운데 누워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돌아가신 엄마의 옷도 입고, 나의 어린 시절 옷도 입고 있는 저 허수아비. 한 때 우리 논을 잘 지켜준다며 고맙고 든든해 나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허수아비. 어린 마음에 눈비 맞을까 노심초사하며 동생처럼 걱정하기도 했던 그 허수아비. 그러나 결국  참새 한 마리도 쫓지 못했던 허수아비. 그래서 나를 친구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줬던 그 허수아비.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창고 한가운데 누워있던 허수아비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둑해졌다. 설명힐 수는 없지만, 허수아비를 갖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몇 걸음 걷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바로 우리 논이다. 이미 몇 주 전 추수가 끝난 논. 올해는 아빠가 벼 한 톨도 추수하지 않은 논.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논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보니,  가을은 우리 논에 허수아비가 서 있지 않았던 유일한 가을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어쩌면 올 가을이 허수아비가 서 있지 않는 가을의 시작일 수도 있다. 아빠가 없는 기을의 시작일 수도 있고.


그래.

아빠에게는 엄마 옷도, 내 옷도 없던 가을이었구나.  아니, 엄마도 나도 함께 하지 못했던 가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더 힘겨운 가을이었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려 다시 창고로 향했다.

허수아비를 꺼내야겠다. 이미 추수도 다 끝났고, 쫓아 버릴 참새도 한 마리 없겠지만. 아빠에게 허수아비 아주 잘 있다고, 나중에 하늘에서도 잘 볼 수 있게 우리 논에 두고두고 잘 두겠다고 말해야겠다.


순간 눈앞이 흐려진다.

아빠, 아빠를 되뇌어 본다.

바보 같은 아빠. 깟 허수아비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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