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모처럼 시간이 나 컴퓨터 언어인 파이썬이나 좀 배워볼까 싶었다. '파이썬(Python)?컴퓨터 언어의 일종으로 인터프리트 방식의 언어.' 제목부터 왠지 어려워 어쩌다 관련책이나 뉴스를 접할 때면 곁눈질로만 스쳐 지났던 바로 그 언어다. 요즘 인공지능, AI, Chat GPT 등에 다들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조금 더 눈길이 가게 되었던 그 언어. 학교 일도 아니고 평소 딱히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편이 아닌 터라 집사람이나 아이들에게 너무 한가한 남편이나 아빠로 보일까 싶어 컴퓨터 학원 수강은 엄두도 못냈다. 그냥 집 근처 도서관에서 관련 책 한 권을 빌리고, Chat GPT, 무료 동영상 강의 등의 힘을 빌려 ‘독학’으로 도전해 본다. 처음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음, 그렇군..,
이 정도면...
책의 처음 몇장은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그램 명령문들을하나하나작성할수록, 작성한 명령문을 실행을 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오류(Error) 메시지가 뜬다. '왜 이러지...?' 몇 번을 반복해서 수정을 해본다. 여긴가? 이쪽인가? 그런데, 아무리 수정을해도 도무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예 오류가 난 저장된 파일을 다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작성을 해야 하나...
SyntaxError:
Missing parentheses in call to 어쩌구 저쩌구...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름 원인을 찾으려고 한참을 모니터만 쳐다본다. 한참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보니 혹시 프로그램만의 문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컴퓨터가 문젠가?파이썬 프로그램 업데이트? 컴퓨터 하드디스크 용량? 메모리 문제? 또 아니면...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컴퓨터 화면의 오류 메시지들이 다시보이기 시작한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수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수정하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해 경고를 날리는 것처럼 느껴진다.아니, 정말로 나에게 경고를 날리고 있다!
깜빡 깜빡, 경고1.
깜빡 깜빡, 경고1.
이 메시지는 당신을 향한 것입니다.
바로 당신 인생의 오류 메시지입니다.
어라?
지금껏 살면서 '내 인생에서 오류 메시지가 나왔던 적이 언제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오류 메시지라.어쩌면, 지금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 처음 보는 컴퓨터 언어를 배워보겠다고 하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오류일지도 모르겠다.
깜빡깜빡, 경고 2.
깜빡 깜빡, 경고 2.
오류 메시지.
인생의 오류 메시지.
당신. 바로 당신 말이야.
이제는 모니터 위에 수많은 오류 메시지들 사이에 조그만영상들도 겹쳐 보였다.
뭐지?이 작은 영상들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날 몸에 맞지도 않는 큰 옷을 입고, 하얀 손수건 한 장 가슴에 꽂고 어정쩡하게 운동장에 서 있는 장면, 초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는 여자 아이와 짝이 되었는데, 그 아이는 바로 담임선생님에게 짝이 맘에 안 드니 바꿔 달라고 울면서 말하는 걸 보던 장면, 대학교 재수할 때 생각보다 비싼 학원 등록금을 부모님께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을 때의 장면, 나이 들어 결혼을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 눈치 보며 청첩장 돌릴 때, 그리고 무덥던 어느 여름날 새벽에 둘째가 생겼다는 집사람의 한숨 섞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장면 등등.
지금 다시 보며 생각해 보니 모두가 오류 메시지였다. 내 인생의 오류 메시지.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던...
어느덧.
오류 메시지들과 조그만 영상들로 모니터가 한가득이다.
보이는데로급하게오류메시지들과작은 영상들 하나하나 수정하려고 하니 전혀엄두가 나질 않는다. 차라리 지금껏 작성한 명령문들을 다지워버리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그냥 싹 다 지워 버릴까?'
그러면 지금보이는 오류 메시지들과작은 영상들도 다 없어질까? 이내 인생의 오류들을 모두 지울 수 있을까? 1학년 입학식이며 2학년 때 여자 짝꿍, 재수시절 비쌌던 등록금, 늦은 나이의 청첩장, 그리고 한참을 안아달라, 놀아달라 떼를 쓰다 내 옆에서 곤히 잠든 둘째까지?
깜빡 깜빡, 오류 메시지들.
깜빡 깜빡, 모니터 속의 오류 메시지들.
깜빡 깜빡, 모니터 속의 오류 영상들.
깜빡 감빡, 내 인생의 오류 메시지들.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오류메시지들을, 저 작은 영상들을 지우려 하니, 오류 메시지들의 앞뒤 순간들이 자연스럽지도, 뭔가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지도 않고, 하나도 나의 삶 같지 않다. 생각해 보면 오류가 생겼던 매 순간마다어떻게든 수정하려고, 이겨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이제는 컴퓨터 모니터 속의 오류 메시지들과 영상들이 점점 더 내 삶의 오류 메시지들로보였다. 일부 메시지들은 점점 더크게 보이기까지시작했다. 수정하고 수정했던 내 인생의 오류 메시지들이, 오류 메시지들과 영상들이 점점 더 커지면서 한꺼번에 내게 외치고 있다!
순간, 그냥, 모니터를 끄고 싶다.
에라, 모르겠다. 전원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모니터가 꺼지지 않는다. 컴퓨터가 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