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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역사 Feb 28. 2020

이슬람은 어떻게 중세의 경제 패권을 장악했을까?

#6 어음 화폐 시대


앞선 편에서 고대 시대의 화폐가 어떤 시스템으로 흘러왔는지 알아보았다.



고대 화폐 - 인간 화폐 시대

#1 화폐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2 예물 예단의 역사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3 부르카에 얽힌 인간 역사

#4 고리대금업이 몰고 온 종교의 역사





이제는 중세기다!



중세기 유럽. 교회와 지주를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 사회



당시 유럽은 지금같은 선진 문화권이었을까?


아니다.




서양의 중세기는 기독교가 교조화되던 시기다. 하느님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정작 인간이 소외된, ‘유럽의 암흑기’로 불린다. 무엇보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던 예수님을... 도리어 과도하게 신격화했던 크리스트교 지배체제였다. 중세 유럽 사회는 이렇게, 종교를 정치 지배체제로 이용했던 사회였다.



『마녀사냥』(신의 이름을 빌려, 혐오의 정치를 자행했던 중세 시대)



그렇게 신의 이름을 팔던 자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AD.400~1400년대까지, 유럽 전체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암흑기를 맞았다. 예수와 무함마드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투쟁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문제였던 고리대금업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자가 완전히 없어짐으로 인해 서유럽의 시장 경제는 거의 멈춰버렸고, 도리어 자급자족 농경 사회로 퇴보해 버렸다.



성전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을 내모시는 그리스도 (by 엘 그레코, in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 군대가 메카의 카바 신전 우상을 정리하는 모습.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해, 무함마드의 모습조차 낙타 위의 투명인간으로 처리했다 (그림 오른쪽 상단)




     


반면에, 중세기 당시 아랍은 어땠을까?



아랍은 자급자족 농경사회로 회기한 유럽과 달리, 어음거래가 성행했고, 발달된 항해술로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경제가 꽃피기 시작했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도, 성경처럼 돈 자체에 대한 이자를 받지 말라 되어있지만, 어음거래로 인한 이자는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경전 『꾸란』 제2장 275절]

고리대금을 취하는 자들은 악마가 스침으로 말미암아 정신을 잃어 일어나는 것처럼 일어나며 말하길, 장사는 고리대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나 하나님께서 상거래는 허락하였으되 고리대금은 금지하셨노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리대금업을 단념한 자는 그의 지난 모든 과거가 용서될 것이며 그의 일에 하나님과 함께 하시니라. 그러나 고리대금업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 있다면 그들은 지옥의 동반자로서 그곳에서 영주할 것이라.




서유럽은 이자의 금지로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했는데, 이슬람은 어떻게 비슷한 조건하에서 어음만으로 경제를 꽃피웠을까?

그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신용’이었다.






오늘날 돈도 마찬가지다. 만약 대한민국과 한국은행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지금 우리 지갑 속에 있는 돈은 그냥 휴짓조각일 뿐이다.



정부가 두 개로 쪼개져, 국가 신뢰도가 바닥을 친 베네수엘라의 현 모습



실제로, 1998 IMF사태 때, 우리나라는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가 부족했던 적이 있다. 따라서 한국 돈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져, 환율이 고공 행진했었다.




IMF 금융위기 사태로, 하마터면 휴짓조각이 될 뻔했던 원화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에서 환율이 급격하게 올랐다는 것은, 무역 시장에 엄청난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당시 대한민국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처럼 ‘화폐=공동체의 신뢰’ 공식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된다.     






이슬람의 어음은 '대금을 약속한 쪽지'였다. 이는 상호 신뢰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거래방식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는 다르게, 신용을 유지할 기막힌 수가 있었다. 바로 이슬람의 십계명과 같은, 쿠란의 율법이었다. 하나가 어음 이자의 허용이었고, 또 하나가 바로 의무적인 성지순례(Hajj)였다.



이슬람교의 가장 기본적인 5가지 실천 의례



이슬람 경전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들은 12월 7~13일에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무함마드가 탄생한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메카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 그리고 사우디의 현 수도인 리야드를 표시한 지도




메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해안 도시이다. 주변 이슬람교도들 수억 명이 성지순례를 하러 메카로 모여든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인다. 따라서 메카에는 세계에 없는 물건이 없다. 이 어원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의 '메카' 용산!"이라고 말하듯...



'메카'의 사전적 의미




메카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이는 하나의 장이 되었다. 혹여나 이슬람 사회에서 어음을 떼먹거나 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이는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에게 퍼져, 그는 거래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상업활동을 할 수 없었다. 오늘날로 치면, 무디스 신용 등급같은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 여기서 사기꾼이라고 소문 한 번 나는 순간, 블랙리스트 등재...




따라서 이슬람교도들은 상행위를 할 때 평판을 매우 중요시 여겼고, 시장에 종교를 중심으로 한 신뢰가 두터워졌다. 자연스레 투명한 경제 시스템으로 인해 그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AD. 1,000년 대, 현 이라크 바그다드의 경제 수준은 세계 최고, 지금으로 치면 뉴욕 수준의 세계 도시였다. 반면 당시 유럽은 중세 암흑기에서 자급자족 사회로 연명해갔다. 이슬람은 바닷길 해류를 타고 전 세계 각지로 항해해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상업이 부를 쌓는 최고의 수단이다. 신밧드와 알리바바가 상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시대도 바로 이때다.



열려라 참깨!






이슬람교는 서아시아에서 생겼는데, 왜 지금은 뜬금없이 동남아시아에 이슬람교도가 많은 걸까?



전 세계 종교 분포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3억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다.




이슬람과 동남, 동북아시아는 당시 세계적으로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꽃피웠고 서로의 종교·문화를 공유해 갔다. 이슬람은 한국, 중국, 일본과도 교역을 했지만, 유교 문화권이 강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퍼지지 는 않았다.


     

7세기 신라의 유물. 유리잔 표면에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고리 장식이 있다. 신라와 이슬람이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화재




하지만 동남아시아는 달랐다. 이슬람교도들은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인도 북부와 동남아 대부분에 이슬람 경전 '코란'이 전파되었다. 이슬람 문화에 매료된 동남아시아는,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신뢰의 징표인 ‘어음’을 경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러면서 현 말레이시아의 믈라카를 중심으로 한때 전 세계 경제권이 이뤄졌다.




중세시대, 아랍은 이 바닷길을 이용해 세계 무역을 장악했다




현재는 동남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를, 바로 옆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가져간 상태... 싱가포르는 이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최고 부자 도시 국가로 성장했다.







이렇게 이슬람교라는 하나의 '신뢰'로 뭉친 전 세계적 공동체가 중세기(대략 6~13세기) 경제를 주름잡았다. 그들만의 어음 화폐는 곧 '신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세계 역사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었다...  


         



다음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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