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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풍경 Oct 07. 2022

초록 예찬

내 나름의 진정 기법 활용기

    안전기반 치료법 가운데 그라운딩 Grounding 은 플래시백이나 약물 또는 알코올 사용의 충동이 올라올 때 사용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이때 집중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신체적, 정신적, 진정형 그라운딩을 시도해볼 수 있지요. 주어진 가이드에 따라 해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만의 요령을 찾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연습을 반복해서 그라운딩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적응해 놓을 필요도 있습니다. 더하여 평소에 진정 기법을 사용할 때 필요한 재료, 즉 그라운딩 물질이나 자원을 준비해 놓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 제게는 산책과 촬영입니다. 산책과 새 관찰, 그리고 그 과정을 촬영하고 결과물인 사진을 공유하는 것은 유효하기도 하지만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행위 자체가 저만의 그라운딩 적용 훈련이기도 하고, 그라운딩의 재료를 채집하는 작업이기도 하니 일거양득이지요. 산책과 촬영 습관이 자리 잡히다 보니 장비 욕심이 나는 것은 수순입니다. 그러나 망원렌즈나 필드스코프의 3~5kg라는 무게조차 제겐 버거운 현실 탓에 아직까지 변변한 장비가 없습니다. 그나마 DSLR 카메라는 있으나 그마저도 어깨가 무거워 사용하지를 못하고 손안에 아이폰 하나만 들고 다닙니다.



    비록 대단스러운 장비는 없어도 산책하며 버드 송을 듣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진정효과가 크게 있습니다. 저의 경우 그저 초록이 좋아서 길을 가다 초록빛 소품만 봐도 굳어 솟아오른 어깨와 뒷목 뼈가 훅 내려앉으니까요. 어깨가 돌덩이 같은데 어떤 수를 써도 긴장이 풀리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 지경이면 기어코 초록과 함께 바람이 들고 나는, 새소리 요란한 곳에 가야만 숨이 몰아 쉬어집니다. 엊그제는 뱁새를 코 앞에서 보았습니다. 새가 있는 곳으로 제가 간 게 아니라 뱁새가 마침 나의 앞에 있어서 가능한 인연이었지요. 그 며칠 전에는 건널목 앞, 소형 맹금류가 5미터 앞에서 쥐를 낚아채며 저공비행할 때도 빈손이었더랬습니다. 아쉽게도 촬영할 수 없었지요. 의도치 않을 때 그리고 빈손일 때 꼭 찾아오는 멋진 만남은 선물과도 같습니다. 그런 중에 다행히 빈손이 아닐 때에는 습관처럼 사진 기록을 남깁니다. 


건널목 울타리에 누군가가 걸쳐놓은 초록 안전모



석양이 지고, 초록 안전모가 속삭이는 듯하다. "잠깐 쉬어"




초록과 축구공. 사물에는 공간을 순간에 붙들어 매는 힘이 있다.




초록에 둘러싸이니 온화할 뿐인 "개조심" 문구



딸아이가 초록 원피스를 입고 비로 초록이 허물어진 길에 멈춰 서 있다.



초록이 깃든 사진들을 모아 정리해봅니다. 모니터에 떠오른 조각의 초록에도 당장 숨통이 트이니 저도 참 별스럽습니다. 문득 이양하의 '신록예찬'이 떠오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는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 물심일여라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 무장무애,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과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이양하, "이양하 수필 전집", '신록예찬', 현대문학, 2001.


돌과 이끼의 질감과 색감이 매혹적이다.



     그는 5월의 신록을 찬양했지만, 차차 서늘해지는 바람을 두른 8월 끝자락의 초록 역시 매혹적입니다. 5월의 신록은 쨍하니 생기 넘치는 발랄함을 빛낸다면 8월 하순 후반의 초록은 묵직하니 담담합니다. 심상하게 슬쩍 내려앉는 성숙한 8월 초록의 과묵함은 고질적인 긴장과 불안을 능수능란하게 무장해제시키고야 맙니다.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칠레의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노래했 듯이, '초록은 침묵'이자 침묵을 수용하는 색이에요. 세상은 붉거나 푸를  것을 종용하는데 초록 아래에서야 자기주장을 하라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 나는 나를 찾습니다.






녹색은 침묵이었다, 파블로 네루다,
"100 Love Sonnets", 'Sonnet X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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