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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Dec 01. 2022

눈이 보고 싶어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으던 소녀처럼

눈 오면 뭐 할까 생각 중

오전 강의를 끝내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들어가려는 찰나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 날씨에 꽃가루도 아니고 뭐지 했는데, 그래 눈이었다. 손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눈이었지만 하얀 가루가 흩날리는 모습이 빛에 비쳐 아름다웠다. 올해 처음 눈이 내리는 순간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었지만 사진에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신랑에게 '눈 오는데 연락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라는 말로 톡을 보냈다. 돌아온 문자는 이모티콘뿐이었다. 설렘은 잠시, 나도 도서관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어린 시절 눈이 진짜 진짜 진짜 진짜 내리지 않는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자랐다. 눈 한번 쌓여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가끔 어쩌다가 눈이 내리기도 했지만 눈은 혓바닥에 닿으면 스르르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아스팔트를 혓바닥 삼아 자취를 감추곤 했다. 눈 뭉치를 모으면 어떤 느낌일까? 눈을 굴리면 어떤 모양이 될까? 눈을 밟을 때 뽀드득 소리가 난다는 데 정말일까? 눈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어른들에게 물어도 사실 우리 엄마, 아빠도 잘 모르는 세계였다. 남쪽 지방에서 태어나 남쪽 지방에서 살아오셨으니. 그래서 나는 그 생생한 눈 체험담도 들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 번은 중학생 때 서울에 있는 고모네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정말 눈 뜨고도 코 베일 서울이라는 말이 걸맞게 코가 베임을 당하는 강추위를 만났다.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라고 말하며 다시는 겨울에 서울에 오지 않을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곧 뒤집혔다. 강추위는 어마어마한 눈폭탄을 함께 데려왔으니까. 온 세상이 하얗게 바뀐다는 게 이런 거구나 베란다에서 눈을 보고 또 보았다. 한참 동안 펑펑 내린 눈은 소강상태를 맞이했고, 나와 언니는 이때다 싶어 집을 뛰쳐나왔다.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모두 나와 눈싸움을 하고 즐겁게 뛰어놀 그림을 그리며 내려왔는데 동네는 너무 조용했다. 모두들 또 찾아온 불청객인 눈을 구박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동네 강아지조차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을 피해 건물 안쪽에 쭈그려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럴 수가.

  



아마 내가 살았던 동네에 이렇게 눈이 왔다면 온갖 교통수단은 마비가 되어 도심 전체가 일시정지가 되었겠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덩이를 만지는 느낌을 원 없이 경험해보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간 남쪽 지방에서 나는 가끔 눈이 내린 하얀 세상을 꿈꾸곤 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혼자 서울에서 살 때에도 엄청난 눈 폭탄을 여러 번 맞았다. 그때도 여전히 나는 눈이 좋아 어그부츠를 신고는 일부러 발자국을 남기고 혼자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는 찰칵찰칵 연신 눌러대곤 했다.




하지만 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이를 낳고 기르며 모두 사그라들었다. 마치 아스팔트 혓바닥에 눈 결정체가 스르르 스며드는 것처럼 그렇게. 콧물이 흘러도 기침이 나와도 하얀 눈만 보면 나가자고 조르는 아이들 때문에, 그런 어린 두 아이를 눈 오는 날 데리고 나가기 위해 옷을, 목도리를, 장갑을, 부츠를 장착하고 나면 사우나에 다녀온 듯 땀을 뻘뻘 흘렸기에 눈에 대한 애정은 씻겨내렸다. 이제 아이들이 커서 알아서 장갑을 찾아 알아서 뛰쳐나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눈이 오면 아이들이 다칠까, 차를 가지고 간 남편은 언제 돌아올까 걱정이 앞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눈이 보고 싶어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던 어린 소녀는 이제 없다. 눈이 오면 차가 막힐까 누가 다칠까 감기가 들까 봐, 눈이 얄미워 눈을 흘기는 아줌마가 있을 뿐. 세월의 때가 묻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지 못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조금은 서글펐다. 눈이 오는 순간을 조금 더 즐기다가 도서관에 들어갈 걸 그랬나 아니면 남편에게 뜬금없이 사랑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음 , 역시 이건 무리수군요) 또 언제 눈이 올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찾아오는 눈은 하얀 눈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진 어린시절로 돌아가 즐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곧 현실 자각 타임이 나를 찾아오겠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그 시절 순수한 감성으로 하얀 세상에 푹 빠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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