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설계는 지켜져야 한다

혼외자 상속과 사후 정의의 충돌

by 민진성 mola mola

나는 그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간다. 연애도 하고, 상처도 받고, 이별도 한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고, 생을 마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죽음 이후 누군가 법원에 나타난다. “저는 고인의 혼외자입니다. 상속을 요구합니다.” 이제 남겨진 가족은 묻게 된다. "그 아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은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법은 ‘사자의 무지를’ 책임으로 돌린다

현행 민법은 혼외자라도 친생자 관계만 입증되면 상속권을 부여한다. 이때 고인이 그 존재를 알았는지, 자발적으로 인지하지 않았는지, 혹은 인지할 기회조차 없었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심지어 고인이 생전에 남긴 유언장조차 무시된다. 유언에 “자녀는 A와 B뿐이며, 이외의 자녀는 없다”고 적혀 있어도, DNA 검사로 친자 관계가 입증되면 그 말은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누구의 책임이어야 하는가?

대부분의 이런 사건에는 '알리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 연애 중 임신했고, 이별했고, 아이를 혼자 키웠고, 끝내 그 존재를 숨긴 채 상대방은 사회적으로 성공해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죽고 나서야 나타나, “상속”을 청구한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


아이를 낳고, 존재를 숨기고, 법적 인지 절차도 밟지 않고,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은 그 숨긴 사람에게? 아니면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유언으로 생을 정리한 채 떠난 사람에게? 법은 아무런 고민 없이 후자를 택한다. 죽은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되는가?

이제 법은 새로운 혼외자에게 "네가 고인의 자녀인 이상, 다른 자녀들과 같은 몫을 가져가라"고 말한다. 그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에게 그것은 갑작스러운 정체성의 붕괴이자, 재산 분할을 넘어선 정서적 붕괴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어요?”, “그 아이는 우리와 같은 자식인 건가요?”, “지금까지의 가정은 뭐였죠?” 그런데도 법은 아무 말이 없다. 법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는 감정 없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사자의 의사는 무시되어도 되는가?

더 큰 문제는 이 구조가 사자의 명예를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고인은 아마도 생전에 그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혹은 알더라도, 충분한 관계가 없었거나 상황상 인정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 어떤 이유든, 그는 삶의 끝에서 유언을 남기고 그 나름의 설계를 완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면 그 설계는 무시된다. 그의 삶의 마지막 말은 “자식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찢겨나간다. 그게 과연 정의인가?



법은 바뀌어야 한다

물론 혼외자에게도 권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는 고의적 은폐, 사자의 무지, 가족의 충격 같은 중대한 현실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반드시 필요한 개정은 다음과 같다:

1. 사망 후 인지 소송의 제한 : 생전 유언·가족 등록이 명확한 경우, 사후 인지에 의한 상속권은 제한하거나 불허해야 한다.

2. 은폐자의 책임 제도화 : 혼외자를 숨긴 사람에게 민사적 책임을 부과하거나, 상속 분할에서 그 기여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3. 사자의 의사 존중 원칙 : 유언장에 “인지된 자녀 외에는 상속 의사가 없다”는 문구가 있다면, 법원이 이를 명시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4. 유족 보호 절차 보장 : 상속자 가족에게 반론권과 절차적 방어권이 주어져야 한다. 지금은 '친생자’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판을 엎을 수 있다.



죽은 자의 설계는 지켜져야 한다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다. 사랑도, 이별도, 선택도 때로는 후회가 따르지만 한 사람의 생은 그가 마지막에 남기는 말로 정리된다. 그 유언이, 그 설계가, 그가 지켜온 가정이 누군가의 고의적 침묵과 뒤늦은 요구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다. 법이 정의롭기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자의 권리뿐 아니라, 죽은 자의 설계와 명예도 함께 지켜야 한다.




#20250710


keyword
이전 29화법인은 공적인데, 왜 상속은 사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