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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Mar 20. 2024

허송세월 인가, 숙성의 시간인가

겨울의 언어

내가 이래서 책을 끊을 수가 없다.


읽는 책마다 어미로서 무릎을 탁탁 치게 만드는 구절들을 만나니 말이다. 미혼인 김겨울 작가님의 글은 아이를 낳고,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자부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역시 그 힘은 '책'인가. 책 외에도 음악, 춤을 좋아하는 작가가 묘하게 나하고도 접점이 있어 그녀의 말이 친근하고, 설득력있게 전해진다.


작가는 아홉살때 (딱 지금 우리 딸들의 중간 나이다.) 세 달 동안  학교 끝나면 네 시간씩 콩쿨을 준비한다. 그런데 갑자기 콩쿨 2주 전 곡이 바뀐다. 세 달 동안 네 시간이면 90일 x 4시간 = 360 시간 연습한 시간이 날라간 것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허송세월 했다고. 그 시간에 수학을 했다면 문제집 몇 권을 풀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당시 김겨울 작가님의 엄마였다면 무책임한 피아노 학원에 컴플레인을 하고, 끝까지 매달려 어찌되었든 연습한 곳으로 대회를 치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5년 전부터 나와 붙어다니는 언니가 입에 달고 살았던 '대한민국에 안되는게 어딨어.' 정신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국 바뀐 곡으로 연주를 끝내고 20년을 더 살아 온 김겨울 작가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현재 인생의 연결고리 안에 그 일을 의미있게 배치한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간 콩쿨 준비의 시간은 오랜 숙성을 통해 지금의 김겨울이라는 인간을 만들어 냈다. 하루에 네 시간씩 연주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무대의 설렘도, 음악의 즐거움도, 마치 DNA에 새겨진 듯 가지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준비의 마법이다.'



그 어떤 육아서에서 만난 문장들 보다 아이의 시간을 존중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거의 매일 아침 잠에서 덜 깨 30분 동안 10숟가락도 먹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주문처럼 말한다.


"아침 시간은 굉장히 중요한거야. 밥을 좀 빨리 먹고, 조금이라도 책 읽고 가는게 어떠니."



이 말에 아이는 늘 한숨을 쉬다.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정리하고, 하물며 아무 생각없이 잠시 뇌를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을 아이에게 기어코 그 시간들을 뚝뚝 끊어냈다. 할 일 많은 11살 아이의 영롱한 아침 시간이 혹시나 허송세월로 흘러갈까봐 그랬다. 사실 이건 아이에 대한 내 욕심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상어가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조급한 엄마가 되었을까.


아이를 재우느라 밥하느라 청소하느라 나를 위해 쓸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모두 허송세월로 여기며 아쉬워했다. 늘 조급했었다. 정작 시간이 생기면 카톡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게 고작이었던 시절에 왜 나는 내 시간을 육아와 집안일에 쓰는것에 인색했을까. 시험, 취업, 일. 젊은 날 내 삶에는 늘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육아에서는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세운다 한 들 내 뜻대로 되지도 않거니와 이룬다 한들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 계절 지난 옷 정리 같은 것들) 금방 원상복귀 되어 어떤 목표이루었는지 조차 잊는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의미 없게 흘러간 것일까.  


김겨울 작가가 무대에서 치지도 않았을 곡을 360시간 연습했던 경험이 음악 DNA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아이의 멍한 아침 시간은 내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아이의 창의 DNA 가 꽃피우고 있는 귀한 시간었을 수도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씩씩대면서 집안일 하고, 아이를 먹이고, 재우던 그 시간은 20대에는 돈주고도 얻지 못했을 인내와 지혜 DNA를 새롭게 탑재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내일 아침엔 아이에게 꼭꼭 씹어 먹으라고, 급할 거 없다고, 여유롭다고. 사랑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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