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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Dec 17. 2023

20년 만에 코엑스를 가다

20대 중반의 나를 만난 특별한 시간

싱가폴에 거주하는 저자가 잠깐 한국에 들어왔고, 미팅이 잡혀서 코엑스로 향합니다.

네비게이션을 열고 시동을 건 후에, 음악을 재생합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내부순환도로가 꽉 막혀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문득 제가 거의 20년 만에 코엑스를 방문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왜 코엑스에 한번도 안 간거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유가 생각납니다.

20대 중반에 사귀었던 한 남자가 있는데, 그 사람과 항상 시간을 보냈던 특별한 장소가 바로 코엑스였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에게 장난 같은 청혼을 받았던 곳도 바로 코엑스였습니다.

20대 몇 년에 걸친 어설픈 풋사랑은 모두의 예상대로 낯뜨거운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고, 저에게 코엑스는 바로 그 사람을 생각나게 만드는 장소였던 겁니다. 그 장소를 제 발로 찾아갈 리가 없죠. 정말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 남자도 아니고 코엑스도 아닙니다. 바로 그 시절의 제 모습이 조금 더 어른이 된 제 눈에는 영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20년 만에 코엑스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길 잃은 송아지처럼 횡설수설하며 약속장소를 힘겹게 찾아갑니다.

지도가 나올 때마다 멈추어 지도를 살피고 어렵게 도착한  별마당도서관 스타벅스 앞에 초면의 저자가 서 있습니다. 악수를 하고 함께 조용한 까페로 이동하여 대화를 나누는데, 저자가 저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금색 종이로 포장된 싱가폴 커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납니다. 20대 시절의 잿빛으로 물든 코엑스에 대한 기억이 이 선물 포장지 하나로 황금빛 선물을 받은 특별한 장소가 되어 버린 겁니다. 코엑스 곳곳에 켜진 크리스마스 트리와 캐롤들, 사람들이 설레는 표정들, 저자와 함께 마신 보라색 레몬에이드.. 지금 눈 앞의 황금빛 현실이 20년 전의 페이지 낱장을 힘겹게 다음 장으로 넘기는 순간입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진 않지만 이 황금색 커피상자를 하루종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코엑스를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귀가하는 길에 별마당도서관을 지나는데, 20년 전에 서성이던 반디앤루니스가 생각납니다. 20대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지, 그 책들을 보며 마음 속의 무엇을 해결했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시절에 항상 추위를 느꼈던 어린 내가 있었기에, 아줌마가 된 지금의 나는 따뜻한 현실을 만드는 뜨개질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네가 있었기에 내가 있다고, 너의 그 많은 실수가 있어서 지금의 나는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20대 시절에 고생한 제 자신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 엄마의 글을 매일 기다리는 나의 극성 1호 팬인, 우리 둘째 봄이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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