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임신한 그와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그의 표정과 반응은 궁금하지도 기억나지도 않는다.
이 불쌍한 영혼을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키워야 하나 하는 막연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술 취하고 담배 피우고 정크푸드 마니아의 정자와 스트레스 초예민 호르몬의 맥주 난자가 만났으니..
이미 만나버린 DNA에게 원 죄를 가지고 시작한 나는 전전 긍긍하며 검사일마다 마음을 졸였다.
5주 차부터 입덧으로 토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계란후라이 기름 냄새만 맡아도 변기로 달려가야 했다.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반쯤 누워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울렁거려서 티브이의 먹방만 나와도 변기로 달려가야 했다.
멍하니 소파에 누워서 남편만 기다리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곳까지 가는 길이 고통스러워 나가지도 못했다.
내려가는 계단 통로 냄새, 상가 화장실,길거리 하수구와 담배 냄새가
정확하게 코를 찌르고 들어오니 나간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입덧은 날로 심해져서 미각을 잃었고
과일만 깨짝거렸다. 먹고 싶은 것이 생겨도 온갖 냄새와 싸우고 토를 하며 도착한 후 포장을 해서
집에 와서 먹어보면 오고 가는 길에 지쳐서인지 미각이 이상해진 건지 생각하던 ㄷ그 맛이 아니니 별로 즐거울 일이 없었다.
그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당일부터 총각 때처럼 12시가 넘도록 술을 먹고 다녔다.
만나야 할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주 3일은 회식을 만들었고 주 2일은 저녁 운동을 갔다.
주 3~4회는 필드를 나갔고 주 2~3회는 PT를 받느라 새벽에 없었다.
내가 밤새 토를 할 때, 매일 술이 떡이 된 그는 집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자느라고 단 한 번을 깨지 않았다.
그렇게 20주가 넘어갈 때까지 나는 토를 했다.
임신 호르몬이 너무 무서운 것이
돌아보니 어찌 견뎠나 싶은 그 시간과 상황들이 그때는 아기가 잘 크고 있을까 이 생각 하나로
전혀 슬프거나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구나, 내가 입덧이구나, 토를 하는구나, 저 사람이 술에 취했구나, 내가 잠이 안 오는구나, 시부모가 또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구나.. 하고 다 지나가 버리는 시절이었다.
아기가 잘 크나,
아기가 지금 뭐가 만들어지는 거지,
아기는 지금 뭐가 필요하지,
오로지 뇌가 아기만을 집중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무서운 임신 호르몬.
20주가 지나면서 토가 멈추기 시작했다.
뇌가 아기로 가득 찬 이 때는 그동안 하지 못한 태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통 집안을 태교로 채웠다.
모자란 아빠 엄마의 무식함으로 원죄를 가지고 있기에 20주가 넘어가는 시간도 안타까워서
남은 20주는 아주 알뜰살뜰하게 태교를 하리라 다짐을 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태교 책이었다.
전 국민 임신책인 노란 책 임신육아 대백과.
그리고 가열하게 진행했던 똑게육아.
그리고 어울리지 않은 바느질을 하며 태교를 했다.
늘 모차르트의 음악을 잔잔히 틀어 두었다.
음식도 이쁜 것 들로 찾아 먹고 체리하나도 이쁜 것을 고르겠다며 고심을 했다.
임산부 요가를 하고 공원을 거닐며 아이에게 네가 얼마나 멋있는 존재인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매일 태교 일기를 쓰고 경복궁을 오가며 왕실태교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실태교는 임신을 하기 전에 부부가 들었다면 더 도움이 될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모란을 그리며 온 우주의 축복을 내 아이에게 보내기 위한 시간에 마음을 쏟았다.
시모의 헛소리도 시집살이도 간섭도 남편의 행실에도
임신 호르몬의 도움으로 혼자서도 꿋꿋하고 씩씩했던 시간이였다.
나의 소중한 마음을 이 작은 생명이 느끼고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원더우먼 같은 힘과 마더테레사 같은 넓은 마음이 공존했고 결혼한 이후 가장 많이 미소짓고 사랑을 표현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