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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작가 Jul 04. 2018

무덤덤함에 스며든 따스함

어렸을 때 난 말썽꾸러기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장난을 꽤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날도 방에서 뒹굴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침대 위에 베개, 인형들을 모아서 이불로 돌돌 말았다. 그리고 이불 위로 나온 푸우 인형 머리 위에 슬쩍 모자를 씌워 놓았다. 

엄마가 마루에서 윙윙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언제 들어올지 모를 엄마를 숨어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거의 책상 밖으로 뛰쳐나가기 직전 드디어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청소기 선을 꽂으셨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책상 밑에 숨어 있는데,

맙소사.. 엄마가 눈치챈 것 같다.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미 울상이 돼버린 내가 막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가려던 참에 엄마가 다시 말했다.

그때 난 엄마를 완벽하게 속였다는 기쁨에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책상 밑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날 보고는 엄마 나름의 무덤덤함으로 어린 나와 놀아준 것일 테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인가 갑자기 바닥으로 뚝 떨어진 성적표를 받고 난 엄마에게 처음으로 죄송하단 편지와 함께 성적표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도 그랬다. 엄마는 저녁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 먹으라고 나를 불렀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때 엄마는 나를 온전히 믿어 준 거라고, 그리고 지켜봐 준 거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후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나에게 성적표를 보여 달란 말을 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참 무관심한 엄마를 둬서 좋겠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지금도 엄마는 가끔 "별일 없재?" 하고 문자를 보낸 뒤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나한테 혹시 방해라도 될까 봐 아직 한국시간으로 저녁 아홉 시도 채 안됐는 데도 "그만 자야겠다. 피곤하다" 하며 바로 말을 끝맺는다.


어렸을 때는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엄마와 친구의 모습이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난 이런 엄마의 무덤덤함이 참 좋다. 그래서 엄마한테서 온 짧디 짧은 문자를 받으면 오히려 러브러브모드가 폭발하는 이모티콘들을 잔뜩 보내곤 한다. 그러면 엄마도 쑥스럽지만 작은 이모티콘과 함께 대답하니까.



나도 보고 싶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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