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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작가 Jul 11. 2018

딴짓을 하면 좋은 점

1. 책상 주변이 깨끗해진다.

2. 귀찮고 하기 싫었던 일을 향한 의욕이 넘친다.

3. 아주 우연한 기회에 꿈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난 독일어로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페이지를 다 채우는 게 부담스러워 빈칸에 한두 개씩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게 웬일인지 너무 재밌는 것이었다. 게다가 틀린 문법을 고쳐주기로 약속한 제이미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이 책의 시작이었다.


어렸을 때 난 틈만 나면 오빠 방 옆 작은 창고에 가득했던 드래곤볼, 삼국지 같은 만화책들을 즐겨보곤 했다. 가끔은 만화 캐릭터를 그려서 책받침으로 만들어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마케터로 일하면서도 솔직히 난 자료를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보다 제품 디자인을 의논하고 파워포인트에 어떤 색의 도형을 넣는 게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논문을 쓰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고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종이 위에다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닌 데다 대충 자료들을 프린트한 종이 끄트머리에다 그렸기 때문에 거리낄 게 없었다. 처음에는 눈 앞에 있는 펜이나 컵, 핸드폰 같은 소품들을 하나씩 그리던 게 점점 책상이 되었고 방 전체로 커졌다. 그러면서 쓰게 된 것이 그림일기였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독일어로 한 문장씩 쓰고 그림으로 빈 공간을 채워가면서 어설프게 하나하나 그리던 게 바로 지금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림 캐릭터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미술시간에 알록달록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바닷속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처음으로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눈처럼 새하얀 도화지 앞에만 앉으면 ‘잘’ 그려야 된다는 부담이 생겼고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어느새 연필을 들고 선 하나 긋는 것도 긴장되고 어렵게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그런 것 같다. 

뭔가를 해내고 말겠다며 잔뜩 힘이 들어갔을 때보다, 때론 ‘딴짓’이라고 가볍게 칭하며 부담 없이 자연스레 하는 일들이 어쩌면 내가 정말 원하던 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동안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나에게 꿈은 일부러 찾아지는 게 아니었다. 

다만 흘러가는 데로 두고 따라갔더니 어느새 제법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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