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다가온 은혜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에는 망자들이 지나가야 하는 다섯 개의 강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통의 강 아케론, 비탄과 통곡의 강 코키토스를 지나 불의 강인 피리플레게톤에서 남아있는 감정을 다 태우고 , 두려움과 증오의 강인 스틱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테의 강을 건넌다.
레테의 강은 망각의 강으로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잠이 드는 과정이 죽음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화에서처럼 꼭 목숨이 끊어져야만 저 여정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저 고통의 강과 통곡의 강을 건너고 어느덧 감정까지 마르고 나면... 저절로 인간은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된다.
영원한 고향을 잊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이켜 갈 수 없는 길을 가게 된다고나 할까.
망각의 레떼의 강을 건너 살다가 내가 누군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도 잊고 세상에 정신을 두고 살다 육신이 숨을 거두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다시 저 위의 다섯 개의 강을 헤매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망각은, 잊었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사실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바 된 것이다.
망각은 그래서 어리석음이요, 어두움이었다.
세상이 주는 망각의 물을 마신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리석음이었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모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곁눈질하면서 나도 무작정 그렇게 살기로 맘먹었던 바보였다. 고집조차 세서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배운 대로 열심을 다한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런 내 삶에 어느 하나 내 예상대로 된 건 없었다.
철저히 부서지고 어긋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더는 기운이 빠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나는 멈춰서지 않았는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그 보다 더 묵직하고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혀야 멈출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사방이 고요해졌던 그때.
내 울부짖음을 듣는 이가 나밖에 없는 줄 알았을 때.
나는 그때서야 작지만 또렷한 어느 존재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나는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하고 생각했다.
말다툼을 하다 자기 집으로 도망친 친구를 쫓아가 그
집 앞에서 큰소리로 삿대질하고 진상을 떨다, 친구가 아닌 그 아이 부모님을 한꺼번에 맞닥뜨린 거 같이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사방은 고요한데, 음성의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슬그머니 심통이 올라왔다.
뭐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는데 나를 안다니.
동문서답이지 않은가? 아... 나는 드디어 미쳐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와 내 안의 소리를 구별 못할 만큼 나는 심약해져 있구나, 그럼 그렇지.... 너무 안 먹고 기력이 빠져 그런가 보구나... 하며 벌떡 일어나 밥을 우걱우걱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런 내 모습조차 나는 두려워졌다.
죽는게 낫지 혹시 미치면 더 큰일인데,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나를 채근하며, 나는 뭐든 주워 먹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잊혀지지가 않았다. 나를 안다는 말.
뭘 안다는 거지? 나의 언제부터 안다는 걸까?
질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궁금한 질문들이 생기면 늘 책을 통해 답을 얻었지만, 이상하게 성경책은 읽을수록 알 수 없고 반감이 들어서 주로 잠을 청해야 할 때 읽곤 했다.
잠이 안 올 때 성경책을 읽으며 나는 논리적으로 안 맞는 부분들이나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을 그저 소설이나 무협지 읽는 심정으로 심드렁하게 읽곤 했는데 하필 그날따라 펼쳐 읽은 부분이 시편 139편이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놀라웠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거기에 속속들이 있었다.
나는 한창 배고팠던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 성경책과 신앙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고, 내 발로 찾아가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하루 한시도 미룰 수 없는 매끼 밥 먹는 일, 매주 필요한 돈들과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세의 분량이 은혜로 그 순간부터 척척 들어오거나 저절로 해결이 되거나 , 갚아지는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아니, 생각지못한 방법으로 살아지기 시작했다.
목돈으로 들어와 나를 안심하게 하는것이 아니었다.
꼭 그만한 분량만큼씩만.혹은 매일, 혹은 매주, 혹은 격주로 .. 아무튼 살아졌다.
때로는 위트있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알수없는 방식으로.
하지만 죽음의 강과도 같은 망각의 강을 건넜던 나에게 찾아와 준 구원의 빛은, 생활고의 해결만이 아니었다.
극단적 생활고와 상처받은 자존감과 우울과 절망의 긴 시간을 지나온 나의 칠흑처럼 어두운 삶은 오히려 빛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할뿐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따라갈수 있도록 비추인 빛.
내 눈 안에 처음 비친 그 빛은, 눈으로, 마음으로, 나의 머리로 들어가 나를 비추었다.
깊은 어두움에는 작은 빛만으로도 충분했다.
빛이 존재하는 곳에서 어두움이란 빛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일 뿐이라는 걸, 나는 그때부터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망각과 죽음의 강건너에 있던 나를 찾아와 이름을 불러준 그분 때문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