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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Mar 26. 2022

친절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회의 중 복부에 큰 통증을 느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사무실 바로 앞 병원에 가니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고, 조금 더 규모 있는 병원에 가니 염증 수치가 너무 높다면서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종합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한 뒤 응급실에 누워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한참 뒤 의사는 급성신우염으로 의심되고, 최소 일주일은 입원해서 항생제를 링거로 맞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커튼 뒤로 사라지자 나는 병원 천정을 보면서 웃었다.

좋아서 가슴도 뛰었다.     


당시 나는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바빴다. 사선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 법원이 쉬는 휴정기를 제외하고 평일에 연차 휴가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일이 많은 것만이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상사의 비효율적, 비상식적이라고 생각되는 업무지시가 제일 스트레스받았다.    

  

내가 근무하던 법무법인에는 당시 60명 정도의 변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입장에 있던 다른 소속 변호사들이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대표변호사님과 함께 타고 있는데 어떤 (사회성 없는) 변호사님이 나에게 “0 변호사님은 좋으시겠어요. 야근을 안 해도 되니까.”라고 했다. 황당했다. 나도 밤에 집에 가는데, 야근이라는 것은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다른 팀 소속 변호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자정 넘어 일을 하고 있는데, 파트너 변호사님이 들어오셔서 “야식 먹고 하자.”라고 했다고 한다.

야근이란 그런 정도가 야근인 것이었다.

요즘은 워라벨에 대해서 강조하는 분위기지만 그때는 분위기가 지금 같지는 않았다.


똑똑하면서도 체력까지 좋은 동료 변호사들 속에서

나는 뭔가 스마트하지도 않으면서 체력마저 떨어지는 모지리 같았다.


이런 생활이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게 확실한지 늘 궁금했었다.      

어떤 날에는 교통사고를 당하되 중상은 입지 않고 입원은 할 수 있는 정도로 다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하루만 쉴 핑계를 댈 정도의 경상이라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급성신우염이 온 것이다.

철없는 생각이지만, 교통사고로 뼈를 내주지 않고도 무려 일주일이나 입원이라니..

좋았다.     



입원할 병실이 정해져서 병실로 들어갔다. 2인실이었다.      

내 옆 침대 환자는 40대 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내가 인사하며 “오래 기다려야 된다고 했는데 금방 병실이 났더라고요.”라고 하니 “그 침대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새벽에 돌아가셨어요.”라고 했다.    

 

나는 침대에 커튼을 치고 잠만 잤다. 세수도 양치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감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오로지 잠만 잤다.


끼니를 놓치기도 하면서 며칠 내내 잠만 잤다. 당시 불면증이 심했는데 그 병원에서는 신기하게 낮에도 밤에도 잠이 잘 왔다. 매일 밤 간호사가 염증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피를 뽑아갔는데 그것도 못 느끼고 쭉 잔적도 있었다. 나는 며칠을 굶어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는 사람처럼 잠을 먹고 있었다.   

  

입원 며칠이 지나도록 옆 침대 환자와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꾸준히 자신이 먹는 간식의 일부를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씻은 방울토마토를 그릇에 담아 내가 자고 있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아두기도 했다.


어느 날 새벽 3시 무렵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옆 침대 환자가 불이 꺼져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옆 침대 환자가 나에게 환자복 한 벌을 들고 와서는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해서 내 침대 시트를 갈아주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염증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 위생이 중요하잖아요.

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왜 머리를 감지 않는지 물었다.


당황한 나는, 

팔에 링거를 꽂은 채 머리를 감으면 주삿바늘이 쑥 더 들어갈까 봐 무서워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그녀는 자신은 주사를 가슴에 맞고 있으니 양 팔이 자유롭다며 나에게 머리를 감겨주겠다고 했다. 내가 사양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저는 원래 머리를 감지 않는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끌려가듯 욕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링거 맞 팔을 쭉 빼고 어설프게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물이 따뜻한지 살펴보고 내 머리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내 머리카락에 골고루 물을 묻히고는 샴푸로 머리 구석구석 씻었다. 그러고는 다시 따뜻한 물로 헹구는데 꼼꼼히 헹구느라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구석구석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 능력보다는 더 벅찬 일을 해 오면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무너지면서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고 도움이 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다 어른인 것처럼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말 몇 마디 했을 뿐인 낯선 사람의 친절에 울컥해서 어린이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샴푸를 헹구는 물이 얼굴을 타고 내릴 때 눈물도 계속 흘러 내려갔다.   

   

그녀는 천천히 정성스럽게 내 머리를 감겨 준 다음 내 머리를 말려주고, 빗어 주었다. 나는 링거를 꽂은 한쪽 팔을 쭉 뻗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병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악성림프종 암이고 항암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밤에 잘 자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에겐 중학생인 아이들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복잡하고 힘들 텐데 생면부지의 나에게 그런 친절을 베푼 그녀에게 감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퇴원 후 나는 더 이상 다른 변호사님도 나처럼 힘든 건지, 나처럼 안 행복한 건지 궁금하지 않았다. 입원 전보다 내 마음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해,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해마다 그녀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었다. 그녀도 퇴원이나 아이들 졸업식 등 일정이 있으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근황을 알렸다.


그녀는 퇴원 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창 선운사 근처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예쁜 꽃이 보일 때마다 나에게 사진을 보내왔다.


어느 날은 선운사에 동백꽃이 피었으니 나에게 한번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내가 내려가겠다고 하니 좋아하며 내려오면 머리를 감겨줄 수 있다고 농담했다.   

           


이제는 그녀와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도 힘든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조건 없이 내게 베풀었던 그녀의 친절함에 대한 기억들은 퇴원 후 생활하는데도 힘이 되었다. 지쳐 있는 나에게 잠시 신이 와서 위로해주고 간 것 같았다.     

      


나태주 시인의 ‘내가 너를’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오디오북 시낭송으로 들었는데, 마지막 문구가 위안이 되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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