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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자 농부 Oct 19. 2021

틈 7화

훤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러 가는 길에 아운을 떠올린다.

다음날 훤은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아운을 떠올렸다. 11시면 일어났을까. 출구 밖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 친구의 모습에 그는 마음속에 움튼 아운의 존재를 느꼈다. 트위드 스커트에 달랑거리는 귀걸이를 한 연수의 얼굴은 매끄러웠고, 갈색 웨이브 머리는 잘 관리받은 머리카락 특유의 광채가 났다. 그러나 훤은 아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반곱슬의 긴 머리가 방치된 정원의 넝쿨처럼 자라 허리춤에서 흔들리던 모습. 헐렁한 원피스를 청바지 위에 툭 걸쳐 입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눈빛. 동시에 은행원인 연수의 연봉, 자신의 자동차 할부금, 지난달 치과의사와 결혼한 사촌 형이 떠올랐다. 연수가 꼭 가보고 싶어 했던 도산대로의 카페에서 에그타르트와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훤은 생각에 잠겼다.

“오빠, 오늘 이상해.”


샛노란 에그타르트 필링을 클로즈업해 찍던 연수의 말이었다.


“미안. 어제 말했던 회사일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


연수는 훤이 일 핑계를 대고 있단 걸 알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무리해서 타인이 세워둔 경계를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연인이라고 해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계산하는 훤과 연수는 그런 점에서 닮아있었다.




“운, 작업실이야?”


연수와 헤어진 훤은 집 방향으로 탄 지하철에서 전화를 걸었다.


“나야 늘 여기지.”


“나...... 가도 돼?”


훤은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로 갈아탔다. 과장된 톤으로 사연을 읽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훤은 옅은 두통을 느꼈다. 대리운전은 팔팔. 자신의 연봉으로 타인의 현실감각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일공 팔팔. 지난달 퇴직한 아버지의 연금수령액은 얼마일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덩어리 져 가슴 쪽으로 굴러 내려가는 사이 택시는 아운의 작업실이 위치한 빨간 벽돌 건물 앞에 도착했다. 훤은 건물 입구에 서서 지도 앱을 켜고 와인숍을 검색했다. 동네 와인가게. 399m, 도보 5분 거리. 그는 택시가 사라진 길을 따라 걸었다.


“혹시 TIME WAITS FOR NO ONE라는 와인이 있나요?”


“그건 어제 마지막 병이 나가서. 혹시 화이트도 괜찮으시면 추천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부탁드려요.”


주인 남자는 느릿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아래쪽 선반에 놓여있던 와인을 꺼내 라벨이 잘 보이도록 비스듬히 들어 보였다.


“‘갈증의 거리(Rue de la soif)’라는 와인인데요.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화이트로 펑크록 밴드 출신의 주인장이 만드는 내추럴 와인이에요. 자연 효모만을 사용해 와인을 만드는데, 자신을 와인메이커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다죠. 와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포도가 스스로 자연의 힘에 의해 와인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대요.”


초인종 소리에 아운은 문 옆에 있는 거울로 가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틴트를 새로 바를까 하다 말고 문을 열었다.




그림: tae-hope https://www.instagram.com/barista_pa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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