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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9. 2021

틈 8화

아운은 불쑥 작업실로 찾아온 훤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훤은 한 손엔 와인을, 다른 손엔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옛날 통닭 봉투를 쥐고 있었다.


“진짜 왔네?”


짐짓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 척 아운이 인사 대신 꺼낸 말이었다. 익숙한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운은 2인용 탁자에 통닭과 와인을 세팅했다. 그리곤 앉자마자 야무지게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아운이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그냥. 여기...... 생각이 났어. 그림도 아직이고.”


아운은 더 물어보려다 질문을 삼켰다. 둘은 바삭한 통닭을 뜯고, 청량한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며 서로에 대해 묻고 답했다. 안지는 오래지만 지인의 거리를 유지한 둘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아운은 들으면 쓸쓸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를 좋아했고 훤은 에릭 사티의 Je te veux를, 아운이 겨울을 좋아한다면 훤은 가을을, 둘은 산보다 바다를 선호했다.

“오랜만에 같이 그림 그려볼래?”


두 잔째 잔을 비운 아운이 물었다.


“뭐, 그릴 건데?”


아운의 손가락이 식탁을 가리켰다.


“와인 마시면서 그려보자. 주말의 흔적. 이런 제목 어때?”


둘은 탁자의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연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훤은 받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 훤이 설정해둔 메시지가 연수의 폰에 떴을 것이다. 훤은 저릿하게 올라오는 죄책감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곤두섰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재즈, 몸을 데우는 와인, 그리고 오랜만에 종이에 닿는 연필의 감각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할 필요도 없이 빠져들었다. 식탁 위 여기저기 기름에 젖어 구겨진 갈색 치킨 봉투와 빈 와인병을 바라보며 구도를 정하고, 병의 곡선을 그리며 훤은 타인의 방향 제시나 디테일 요청도 없는 그림을 그려 본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폰트 좀 키워주시고요, 왜, 레트로인데 촌스럽진 않은 느낌으로 바꿔주세요. 색은 어둡되 너무 어둡진 않고, 세련되게 톤 다운시켜서 부탁드려요.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던 고객의 수정 요청들이 여기엔 없었다.


“좋다.”


훤은 벅차올라 평소보다 빠른 말투로 말했다.


“뭐가?”


*Je te veux: 너를 원해 

<The Blower's Daughter 바로 듣기>

<Je te veux 바로 듣기>


그림: Ross Tompkins And Good Friends, 1978 vinyl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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