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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싫은

스물일곱 번째.

by 운전하는 Y
harpal-singh-RWhqcGJevn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Harpal Singh


밤, 새벽이 지나면 찬란한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겠지요 곧 계절의 여왕을 만날 시간입니다


이상합니다 밝아지는 게 두렵습니다

아마도 언젠가 그날, 불투명하고 낯선 시간에 전화벨은 울릴 거고 아마도 익숙한 사람의 이름도 뜨겠지만 익숙한 사람은 전혀 반갑지 않고 좋지도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불투명하고 낯선 시간입니다

아마도 언젠가 그날, 익숙한 사람에게서 온 전화는 칼 든 강도 같습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멈춰버린 깊은 저수지 같습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무섭단 말입니다


칼 같은 벨소리는 턱끝까지 들이민 피비린내 나는 칼날입니다

발이 닿지 않는 벨소리는 코끝까지 차오른 어둠 속에 고이고 만 물입니다

그래서 축축한 벨소리, 건 사람도 받은 사람도 무겁고 축축합니다


휴대전화를 잡은 손가락 끝에 물방울이 맺힙니다

그 물은 시커멓게 썩은 물 혹은 녹슨 철을 핥은 듯 붉은 물


건 사람과 받은 사람의 이야기는 더 이상 건 사람과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흠뻑 젖은 휴대전화 속 이야기는 주인을 잃었습니다

흠뻑 젖은 휴대전화는 어느 순간 말이 없습니다


좋은 게 좋지 않고 싫습니다 엉망인 게 나을 뻔했습니다


해님달님 속 오누이가 타고 올라간 튼튼한 동아줄은 싫습니다

중간에 툭 끊어져 땅에 떨어져 버리는 썩은 동아줄이 차라리 나을 뻔했습니다

아기돼지 삼 형제 속 막내 돼지의 무너지지 않는 벽돌집도 싫습니다

바람 후- 불면 문 열려 버리는, 차라리 바람에 흩날리는 지푸라기 집을 주세요


무릎에 피딱지 붙이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

함께 읽었던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닌 그들처럼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되었던 그들처럼


썩은 동아줄 타고 땅에 고꾸라져 처박힌 호랑이면 어떤가요

입바람 한 번에 지푸라기집 문 활짝 열고 도망친 첫째 돼지면 또 어떤가요


썩은 동아줄이 좋아요 활짝 열리는 지푸라기 문이 좋단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여왕이라는 계절은 늘 맵고 칼칼하게 시작합니다

여왕이라는 계절은 잔뜩 붉고 화려한데, 그래서 좋아도 좋지 않고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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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