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휘청

나의 술 항아리

by 문인선
휘청휘청,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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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의 나는
해가 지고 나면
대체로 취해 있었다.

평일 오후는 늘 취해 있었고,
주말 종일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맨 정신을 지냈다.

스무 살,
늦게 배운 도둑질인 술 덕분에
적당히 또는 지나치게 취해 있던
나의 저녁 덕분에

나는 술이면,
술만 있다면
굳이 취직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함양의 어느 산골 마을로 들어가
폐가가 된 깨끗한 집을 골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적당한 텃밭을 일군다면,

대신,

퍼도 퍼도
다시 샘 솟아나는
마법 술 항아리만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에
작업실을 만들어
절반쯤 또는 온전히 취한 채로
쓰고 그리며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배가 고프면
텃밭의 고구마나 감자를 캐고
사람이 그리우면
서울의 친구를 불러
술을 대접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르지 않는
술 항아리만 있다면,
취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의 현대판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마르지 않는 술 항아리를 구하지 못해
함양 지리산 속이 아닌
서울 광진구 아차산 옆에 산다.

텃밭의 감자 고구마는커녕
사과에 묻은 농약도 씻기 귀찮아서
알알이 비닐봉지에 담긴
세척사과를 냉장고에 채워두고 산다.

사천 원, 오천 원
유리병에 담긴 술 값을 매일 지불하며

아, 술 항아리만 있었으면!
하고
휘청휘청 집으로 간다.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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