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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Jul 24. 2022

'벙어리'라 불리던 열 살

room 회갈색.

   그 회갈색의 유년 시절을 시작으로,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다양한 방들이 호텔처럼 촘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속 방들은 내가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그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며 내 인생에 크게, 혹은 작게 영향을 주곤 했다.

그 방들의 이름은 감정이라고 하겠다.




'철'이랄게 없을 유년기 시절.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으레 별명을 가지게 된다. 강아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강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성격이 털털하다는 이유만으로 '조폭 마누라'라고 불리던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불러대며 낄낄댔고, 왜인지 모를 유대감을 잔뜩 느끼면서 서로 더 가까워지곤 했던 것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별명은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내 별명은 아이들의 입에서 쉽게 오르내렸지만, 그 단어는 아이들이 나와 친해지기 위한 '수단'이 아닌 나와 그들을 나누기 위한 '칸막이'의 용도로만 쓰였다. 그 소소해 보이는 세 음절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의 귀로 들어올 때 천장에서 바닥까지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철창처럼 쿵쿵 소리를 내며 아이들과 나의 사이를 굳게 가로막아버렸다.




내 별명은 벙어리였다. 




꽤나 직관적인 별명이었다. 말 그대로 난 학교에서는 입을 꾹 닫아버리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입학 첫날부터 시작된 긴 침묵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고, 6년간의 초등학교 생활 동안 내가 학교에서 했던 말은 손가락, 발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현저하게 적었다. 짓궂은(이라고 쓰고 개념 없는 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아이들은 '너 바보야?'라는 물음에도 '아니야!'를 외치지 못하고 고개만 힘없이 내젓는 나의 뒤에서, 실내화 가방을 붕붕 돌려대며 '벙어리네, 벙어리.'라고 끊임없이 외쳐대곤 했었다.






어느 날은 그런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밀가루를 찍어 바른 듯 얼굴이 새하얗고, 속눈썹이 낙타처럼 까맣고 길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 한마디 해본 적 없었지만 괜히 그 아이를 몰래 흠모하고 있었는데, 내 뒤를 쫓아오며 나를 놀려대던 무개념 아이들과는 다르게 늘 모범적이고 성실한 아이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후덥지근한 열 살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의 나는, 우연히 그 밀가루를 바른 낙타 같은 아이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속으로는 내심 기뻐했지만, 나 같은 애가 뭘 어쩌겠나- 하는 패배감이 내장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걸 온전히 느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는 수업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내가 신기했던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 너 말 못 해?"


... 수치심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내 입술은 그 수치심에 굳어버린 듯이 조금도 움직일 줄을 몰랐고, 그 아이는 나를 더 빤히 보더니 옆에 놓인 사인펜 한 다스를 집어 들고 한 자루씩 내 앞에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색?"


"..."


"이건?"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빨간색 사인펜이, 꼭 내 안에서 배어 나오는 상처같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나는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지나치게 많았고, 낯선 환경에 놓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어느 정도 말을 잘하는데,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앞에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6년 내내 친한 친구도 당연히 없었고, 아이들은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나에게 '놀림거리' 이외의 역할을 부여해주지 않았다.



친구도 없고, 10분간의 쉬는 시간을 뭘 하면서 때울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나는 우습게도 공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일요일마다 방영하던 공개 코미디 프로에서는 '토마스'라는 가상의 캐릭터가 있었는데, 투명인간인데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배우들에게만 보이는 등장인물었다. 그것의 영향 때문인지 난 머릿속에 '토마스'라는 가상 친구를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와 가장 비슷하고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상상 속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친구랑 늘 함께 있다는 위안을 얻곤 했다.



학교 쉬는 시간, 급식시간, 수학여행. 혹은 집에서 부모님이 싸우실 때, 언니가 엄마에게 혼이 날 때. 마음이 극도로 흔들릴 때마다 내 머릿속은 토마스가 있는 곳을 찾아  바쁘게 뛰어갔다. 내 상상 속 저 심연의 공간에 자리한 회갈색 벽 방으로 뛰어들어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곳에 조용히 혼자 쭈그려 앉아, 내 옆에 어느샌가 다가온 토마스와 말없는 대화를 나눴다. 실제로는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구거나,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조용히 끅끅대며 우는 게 다였지만.




그 회갈색의 유년 시절을 시작으로,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다양한 방들이 호텔처럼 촘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속 방들은 내가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그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며 내 인생에 크게, 혹은 작게 영향을 주곤 했다. 언젠가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하였고, 언젠가는 며칠 만에 금방 그 방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어느 때의 방은 가상의 친구 '토마스'만 덩그러니 날 맞아주기도 하였고, 어느 때의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한 파티 장면 같기도 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그 방들은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다양한 모양들로 꼭 수십 개씩 생기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끊임없이 그 방 중 한 곳에 머물거나, 계속 방황하며 이 방 저 방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혹은 어느 방 안에도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고 복도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마음속 방을 꼭 한 개 이상 가지고 있다. 그 방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인간을 인간다울 수 있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방들의 이름은 감정이라고 하겠다.




이 백지의 공간에서, 그간 생겨왔던 나의 마음속 방들을 하나씩 들어가 보고자 한다. 어느 날은 청소년기의 검은색 방, 사랑에 빠졌을 때의 핑크색 방, 사회에 발을 내디딘 후 생겨난 파란색 방까지... 유년기 시절 선택적 함구증을 지나, 암흑 같던 청소년기를 버티고 입학한 S대, 성인이 되고 나서 병원을 찾아가게 만든 우울증, 그 과정에서 생겨난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든 과정들을 하나하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듯 한 자 한 자 이 공간에 글자로서 풀어써 내려가 보려고 한다.




나의 이 자그마한 여행이 당신에게도 조금의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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