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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Aug 15. 2022

아빠의 실직, 당신은 나보다 더한 어둠에 있었음을

room 암흑.

그 어둠 속에서 나보다 더 끙끙대고 있었을 당신에게도 밝은 빛이 있음을 증명해줄 존재. 버튼만 키면 당장이라도 이 어둠을 없애줄 수 있는 랜턴, 혹은 성냥을 그어 위에 얹으면 곧 주위를 동그랗게 덥혀줄 양초 한 자루.

나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전 지구의 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재산을 잃었다. 그 고통은 단순히 교과서나 경제학 도서에서 표현하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금융위기'라는 짤막한 단어 몇 가지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우리 가족의 살갗까지 베일 정도로 가까이에서 숨 쉬는 불쾌한 그 무엇이었다.



  아빠가 실업자가 되었다. 이십몇 년을 몸 바쳐 일한 대기업에서 한순간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그 무렵 갓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그 시련은 꽤나 가혹하게 다가왔다. 아빠는 꽤 오랜 기간 방황했으며, 결혼 후 내내 전업주부였던 엄마가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그 당시 우리 집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참 경제활동을 해야 할 시기에 끈이 툭 하고 떨어진 인형극의 인형 같아진 부모님의 눈빛은 한없이 공허했다. 다 같이 어려운 시기니까-라고 허허 웃어버리기에는, 아직은 어린 자식들의 늘어가는 학교 등록금과 점점 비어 가는 통장잔고가 너무나 가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집안에서 38선을 긋고 서로 으르렁대기만 했고, 조그마한 말투 하나로도 갈등은 배가 되어 타올랐. 나는 늘 집에서의 안전지대는 없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학교에서 오랫동안 야자를 하는 시간을 행복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 마음속 방은 빛 한 줄 들어오지 않는 암흑이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던 나는, 꽤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만 모이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모의고사에서도 명문대까지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부모님도 점차 나에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 와서 막연히 생각하기엔, 내가 명문대에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으셨을까- 싶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이 암흑 속 방을 걸어 나가면서, 부모님의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이 방을 나가는 꿈만 종일 꿨었다.




  그 꿈은 늘 행복한 꿈이지는 않았다. 그 기대는 가끔 내 어깨에 큰 돌처럼 끼얹어졌다. 오늘 하루 해야 하는 공부 분량을 다 하지 못해 쏟아지는 잠을 붙들고 문제집의 페이지를 꾸역꾸역 넘길 때, 모의고사에서 마킹 실수로 반 1등에서 밀려났을 때, 부모님이 크게 싸운 날에 엄마가 젖은 눈으로 "너밖에 없다"라고 주문 외우듯 얘기할 때,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어디 어디 대학'을 가야 한다는 목표보다 내 앞에서 오열하는 엄마 아빠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 압박감이 더 심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 형편을 알기 때문에, 난 등록금이 비싸다는 대학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액 장학금 등을 노리기 위해 하향 지원하더라도 어느 정도 괜찮은 학교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 수능을 퍽 잘 본 나는, 원서를 넣은 대학교 리스트를 읊을 때마다 '왜 이렇게 특이하게 지원했냐'라는 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나'군에 S대를 지원했지만 간당간당한 성적이었던 나는, '가'군에서는 Y대를 지원하지 않고 전액 장학금을 줄 수 있다는 학교를 지원하는 바람에, 모든 선생님들에게 'S대는 떨어질 것 같은데, Y대를 쓰지 그랬니, 아쉽구나'는 얘기를 듣곤 했다.



   그때 어린 나의 생각에는 S대는 국립대라 학비가 싸고, 가군에 지원한 학교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니,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도 뿌듯함보다는, 내가 집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음에 대한 억울한 감정이 문득 올라오는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면서도, 나는 정작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많이 없었다. 하교한 뒤 눈에 들어오는 난장판인 집의 풍경, 내 책상에 쌓여만 있는 오늘 내가 해야 할 과업들, 그 옆에 조그맣게 잘라 붙인 S대 마크.(당시 '시크릿'이라는 책이 굉장히 유행했는데, 그 여파로 가고 싶은 대학 마크를 주변에 덕지덕지 붙이고 대학에 붙은 모습을 상상하는 솔루션이 학생들 사이에 굉장히 유행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내 마음속 암흑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꼭 하수구에서 꾸역꾸역 튕겨져 나오듯 오물들을 보듯 그것들을 바라보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운 좋게 S대에 합격했고,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 또한, 그 이후로도 여전히 종종 싸웠으며 때때로 또 집은 난장판이 되곤 했다. 하지만 종종(지금까지) '우리 딸이 S대야.' 하고 주변인에게 자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그때 그렇게 오물들을 끌어안고 '오늘 이것까진 해야 해.', '내일 모의고사는 무조건 1등급을 맞아야 해. ' 하고 오열하던 그날들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다. 그리고 어엿한 사회인이 된 요즘, 난 그 당시의 부모님의 마음에 대해 골몰보곤 한다.



   20년간 몸 바친 회사에서 팽 당한 아버지. 얼마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지. 그 당시의 아빠는 내가 있던 방보다 더 짙은, 한없이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은 더한 어둠에 떨어졌을 것이다. 희망도 없고, 미래는 막막하며, 주변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동정뿐이었을 공간. 그때의 나의 존재는, 주변의 무시에서 그를 지켜줄 방패막, 그의 수치심을 덜어줄 자랑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을 노력한 그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 어둠 속에서 나보다 더 끙끙대고 있었을 당신에게도 밝은 빛이 있음을 증명해줄 존재. 버튼만 키면 당장이라도 이 어둠을 없애줄 수 있는 랜턴, 혹은 성냥을 그어 위에 얹으면 곧 주위를 동그랗게 덥혀줄 양초 한 자루. 나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아직도 종종 생각한다. 한 번도 그런 자리에 나서지 않던 아빠가, 내 고등학교 입학식에 나와 단 둘이 손을 잡고 함께 갔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엄마들이 자식들 손을 잡고 입학 증서를 받고 사진을 찍을 때, 자랑스럽게 내 입학 증서를 받고 뿌듯해하던 아빠가 아직도 현상한 필름처럼 뇌리에 선명하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존경받는 사람이 된 당신. 그때 당신의 어둠이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밝았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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