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책을 읽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그저 수능 '언어영역' 공부에만 매진했을 뿐이었다. 티비 드라마보다 책과 더 친하기는 했지만, 난 '뼛속까지 이과'라고 늘 생각하며 살았기에, 내가 내 손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참 흔하면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학시절 뭣도 모르고 선택한 교양수업이, '단편소설'을 써내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젊은 작가상'의 심사위원을 맡으실 정도로 저명하신 교수님께서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소설'이란 존재는 얼떨떨했고, 첫 수업을 듣고 난 후 드랍(수강신청을 했던 수업의 수강을 포기하는 것)을 한 친구도 꽤 있었지만, 교수님께서는 글이라고는 한 줄도 안 써본 오합지졸들을 모아놓고 꽤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해나가셨다.
흰 종이를 펴놓고, 그날의 기분을 줄줄 써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글들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발표했고, 교수님은 글의 좋은 부분, 아쉬운 부분들을 찝어 부드러운 어투로 찬찬히 첨삭해주셨다. '문학'이라는 것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니, 과제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고, 빗금도 동그라미도 없는, 말 그대로 '힐링 수업'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막연히 그래서, 그 수업이 좋았다.
수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들은 퍽 완성된 글을 써 내려갔다. 큰 틀을 잡고, 하고 싶은 얘기들을 찬찬히 써 내려갔다. 같은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점점 서로의 글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 얘기를 썼다. 내 얘기를 쓰는 게 그때는 가장 쉽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내 얘기를 각색해서 소설로 썼다. 나의 10년 뒤 얘기를 여과 없이 솔직하게 썼다.
제목은 '엑스트라'라고 지었다.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이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A 또한 그런 생각이 강한 사람 중 하나다. 명문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에 취업했지만, 한없이 가족들 눈치만 보는 여자. 결국 가족들 반대에 떠밀려 그녀가 사랑하는 '현수'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미련만 잔뜩 남은 삶을 사는 엑스트라. 그런 여자가 친언니의 결혼식장에서 '현수'를 마주쳤다. 그런데 그 '현수' 또한 그날 그곳에서 결혼식이 있던 것이었다, 뭐 그런 내용.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처지를 한없이 불쌍하게 느낀 주인공이 차 안에서 우는 장면이 있다. 엑스트라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한없이 올라가는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우는 주인공을 글로 쓰면서 나도 한없이 울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내 소설의 초안은 완전한 '감정과잉'이었다. 교수님도 그 지점을 지적했다.
"문아 학생은, 소재는 좋은데 감정이 조금 과해요. 자신의 얘기를 쓰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꿔서 이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요?"
교수님은 다 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셨다. 난 그 웃음이, 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괜스레 좋았었다.
처음으로 주신 교수님의 과제에, 난 착실히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꾼 글을 들고 교수님 방을 찾아갔다. 결혼식이 끝난 후 와인바에 찾아간 새로운 남자 B의 시선에서 본 A의 푸념을 담아보았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헐레벌떡 달려간 교수님 방에서, 교수님은 또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셨다.
"문아 학생은 전공이 뭐지?"
"통계입니다."
"음... 글을 써볼 생각은 없나? 취미로라도 꼭 글을 썼으면 좋겠는데."
글이라니, 글이라니! 물론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고 지적해주시기는 하셨지만, (그리고 결국 평가에는 A0를 주셨지만.) 처음 들어보는 평가에 난 적잖이 당황했다. '글을 잘 쓴다.'는 말도 처음 들어봤고, 글이라고는 어릴 때 유행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을 따라 써 본 게 다인데. 단순히 성적표에 찍히는 숫자보다 더 귀한 말을 들은 나는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남들 앞에서 발표는 물론 일상적인 말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나는, 당연히- 글에서도 자신이 없었다. 내 글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타고난 재능은 거의 0에 수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명문대 교양수업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 '취미로라도 꼭 글을 쓰렴.'이라는 말을 듣다니! 정말 짜릿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기가 첫걸음마를 뗄 때 옆에서 쏟아지는 엄마 아빠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처럼, 내 맘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재능이 있는 분야가 있다.'
그날, 내 마음속에는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났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막연히 가졌다. 언젠가 꼭, 글을 제대로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깊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 보라색 꽃은 점점 더 흐드러지게 피어나, 어느샌가 꽃밭을 이뤘다. 취업준비를 하고, 또 입사를 해서 바쁜 와중에도 그 꽃들은 쉽게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그만 산들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 향기를 뿜어냈다. '글을 써라-' 하고 누가 속삭이는 것처럼 향기가 마음속에 불어왔다.
그 향기를 타고, 오늘 이 자리까지 왔다. 사실 20대 초반에 그 번뜩이는 창의성과 말랑거리는 뇌로 쓴 글들에 비해, 요즘 쓰는 글들은 참 딱딱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썼지? 싶을 정도로 참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내 조약돌 같은 가능성을 봐주신 분께 보답하는 마음에서라도, 글을 계속해서 쓰게 된다. 어쩌면 어느 자리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요즘 내 버킷리스트는 '내 이름으로 된 책 출간하기'이다. 언젠가 책을 출간하게 되면, 내 찌그러지고 소탈한 재능까지도 찾아내 주신 그 교수님께 꼭 한 부 조심스레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