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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Sep 24. 2023

1. 주원의 꿈(1)

새벽은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모른 채 꿈나라에 가는 시간이지만, 주원에게는 그저 늙은이의 코골이 소리가 그치지 않길, 늙은이가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가래를 긁어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길 기도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할아범이 잠에서 깨는 그 시간은, 늘 커다란 페인트통에 빠져버린 것같이 끈적거리는 시간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주원은 할아범과 할멈 손에서 자랐다. 할아범은 결혼 생활 내내도록 할멈을 타박했는데, 할멈이 박색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할멈이 주원의 엄마를 낳고 몸조리도 미처 마치기 전, 할아범은 할멈의 등짝에 발길질을 하며 집안꼴이 이게 무어냐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갓난쟁이 얼굴을 아니꼽게 쳐다보며 '꼭 저랑 닮은 박색을 낳았다-'고 지껄이고 가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할멈은 눈을 부라리며 이를 부득 갈아보았지만, 이내 할아범의 발길질을 겨우 팔뚝으로 가로막으며 손걸레로 방바닥만 부드득 훑는 것이 할멈의 유일한 반항이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로 할아범의 타박을 묵묵히 짊어가던 할멈은, 주원이 태어난 해부터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주원은 주원의 엄마가 갓 대학을 입학할 무렵 태어나, 엄마의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할멈의 품에 맡겨졌다. 이때부터 할아범의 타박은 더욱더 심해졌는데, 왜 딸년을 낳아놔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거였다. 애초에 낳지 않았다면 없을 고생이라는 거였다. 주원이 빼액-하고 젖을 달라고 울면, 할아범은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라'며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할머니는 '아유- 갓난쟁이가 뭘 안다구 그러슈-' 하며 할아범의 등을 커다랗게 쓸어내렸다. 주원의 엄마는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애인이 사준 거라며 두 손에 가득 장난감을 사 온 채였다.   


  주원이 5살이 될 무렵, 주원의 엄마는 한국을 영영 뜨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할아범이 집에 없는 날을 틈 타 야반도주하듯 트렁크에 짐을 한가득 실었다. 주원은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꼭 마지막인 것을 아는 듯 쉴 새 없이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그런 주원을 보며, 지금까지 주원에게 보여줬던 것보다 곱절은 환한 미소로 주원에게 인사했다. 엄마의 뒷모습을 오도카니 지켜보던 할멈이 딱 한번, 주원의 몸을 한 움큼 감싸 꼭 안아준 게 그날의 끝이었다.  


  학창 시절 주원의 모습은 꼭 고슴도치 같았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가시를 세우고 경계하기에 바빴지만, 친구들이 '너 공부 잘한다-'고 한두 마디 칭찬을 하면 꼭 간식을 받은 고슴도치처럼 당장 경계를 풀었다. 바자회라도 열은 것처럼 자신이 풀지도 않은 새 문제집이며 새 학용품들을 가방에서 와르르 꺼내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할멈은 종종 그런 주원이 빈 필통으로 집에 돌아오는 걸 보면, 제발 그러지 말라며 주원을 타이르곤 했다. 그럼에도 주원의 필통은 꽉 채워진 날보다 텅 비어있는 날이 많았다.   


   주원은 공부도 곧잘 했다. 초등학생 때는 전교에서 한 손안에 들더니, 중학교 때는 시에서 알아주는 모범생이 되었다. 주원이 성적표를 들고 올 때마다 할멈은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굳이 티비 뉴스나 보며 정치인 욕을 되새기는 할아범의 눈앞에 구겨진 성적표를 펼쳐 보여주기도 했다. 할아범은 '그깟 계집이 공부 좀 잘해서 어따 쓰게.' 하고 투덜거렸지만, 할멈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뿌듯한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이곤 했다. 주원은 어쩐지 그 미소가 좋았고, 할머니의 한없이 벌어진 입만큼이나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로 수놓아진 성적표를 가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멈은 주원의 '1'로 수놓아진 성적표를 딱 1년 받아본 뒤, 주원이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던 해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주원은 일주일 간은 등교조차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 발을 내딛으면 딛는 바닥이 그대로 지하로 꺼져서, 주원의 몸뚱아리도 저 심해로 뚝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발을 내딛으면 그 딛는 바닥이 한참 동안이나 주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등교를 하는 그 10분 사이에 10번이나 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세상이 정말로 이렇게 빙글빙글 도는 것이면 오히려 더 나을 것 같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텅 빈 집에는 주원과 할아범만 남았다. 눈 한쪽과 다리가 불편한 할아범은 대부분은 안방 침대에 매미처럼 붙어 지냈다. 주원이 집에 들어와 할아범에 고개를 까닥-하면, '쯧, 왔냐.' 하고는 서로 말이 없었다. 매일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할아범은 잠귀가 유독 밝았는데, 한창 성장기일 주원이 밤중에 과자라도 먹고 싶어 바스락거리려 하면 이내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이다.  


"상년아, 지금이 몇 신데 쳐 안자!"


주원은 부엌 찬장에서 겨우 집은 과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곤 했다. 주원의 몸무게는 할멈이 있던 시절보다 10kg이 넘게 빠졌다. 체중 감소는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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