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드로잉의 시작
어쩌다 첫 여행 드로잉
나의 첫 여행 드로잉은 처음부터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실행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여행기간이 길고 이동시간이 지루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을 챙겼을 뿐이다.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늘 독서랑 낙서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그 취미생활에 충실하고자 함이었다.
계기는 사소했다. 비행기 티켓을 발권하고 보딩 전 들린 햄버거 가게어서 배를 채우다 문득, 아, 나 출국 전에는 늘 햄버거를 먹는구나 라는 생각 하나. 그리고 아 맞다, 나 노트도 있는데 이 남은 감자튀김이나 한번 그려볼까, 라는 찰나의 생각으로 여행 드로잉을 시작하였다.
"어떻게 여행 드로잉을 시작하게 됐어요?"
"아, 햄버거 먹다가요"
이런 하찮은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대답이 너무 볼품없어서 조금 지난 후에 대답을 수정했는데, 그 대답은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이다.
우리가 겪는 많은 일상의 장면과 스치는 많은 생각 중에 실천이 가해지면, 그리고 그것이 조금 지속되어 습관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천한 계기도, 지속하는 이유도 잊어버리게 되기 마련이다.
이 사소함으로 시작되어, 혼자 한 여행은 남는 것이 시간이라 결국 한 장소에 들릴 때마다 한 장면을 담아오게 되었고, 돌아보니 지난 여행들과 다르게 여행지 곳곳의 장면들이 뜻깊게 기억되게 되었다.
여행은 눈으로 담거나 사진으로 남기는 찰나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손으로 기억할 수 있구나. 오래 관찰하고 그린만큼 오랫동안 눈에 담겼고, 그만큼 떠올리면 웃음 짓게 되는 따뜻한 기억을 함께 담아왔구나. 그곳에 머물러 그리는 동안 할애한 시간만큼은 고스란히 노트 안에 담겨있었다.
그 뒤로 쭉 여행 드로잉
첫 기억이 좋으면 두 번째 행동으로 옮겨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이듬해 여행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는 이미 데일리 드로잉을 시작하여 매일 한 장면씩 그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고, 두 번째 여행에서는 하루에 한 장이 아닌 두장, 혹은 세장도 그리는 날도 있었다.
우리가 흔히 '눈으로는 다 담을 수 없어'라고 하는 말처럼, 여행지의 색감은 아무리 좋은 사진기를 들고 가도 똑같이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다.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 풍경을 똑같이 담아낼 수 없다.
여기서 여행 드로잉의 묘미가 더 되살아 난다.
결국 '내가 관찰해서 담아야지 하고 선택한 장면'을 그리게 된다. 대부분을 생략하고 스케치북에 다 담을 수 없는 잘려야 하는 크기인데도 욱여넣을 때도 있다. 그건, 내가 그렇게 이 장면을 담고 싶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진보다 더 내 마음대로이다.
여행지에서 무턱대고 인증샷을 찍기만 하던 습관이 줄고,
여행지를 눈에 담고, 피부로 맞이하고, 스토리를 담아서 선택한 장면을 그리는 습관이 늘었다.
그리고 하나의 동선이 되었고 일기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여행 드로잉 이래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던 여행이다.
비행기에서 배로, 배에서 자동차로, 자동차에서 다시 기차로, 기차에서 다시 배로.. 이동수단이 화려했던 만큼 그 시간은 길었고 ,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드로잉으로 일기를 쓰며 시간을 메웠다.
발걸음을 옮기는 장소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드로잉과 짧은 글귀를 함께 적기도 했다.
정말로 마치 그림 일기장이 되는 듯한 여행 그림일기 었다.
때로는 즉흥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아무 계획 없이 땡처리 비행기표를 사서 일단 떠난다.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현지에서 사서 충당한다. 어디로 갈지는 그때그때 검색하거나 피로도에 따라 달라진다. 비가 오면 장소를 바꾸기도 하고, 갑자기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며 멀리 떠나기도 한다.
이번 여행이 그랬다. 그 즉흥적인 마음이 곳곳에 담겨있고, 즉흥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겨우 3일뿐이었지만 15장의 그림을 그린 여행이었다. 선택한 장소들은 계획이 없어서 그런지 실망할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모두 좋았다. 나, 여기 다녀갔어, 참 좋았어,라고 말해주는 공간 공간들.
이 드로잉은 장소보다는 만난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 그림들이다.
왜냐하면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그리는 동안 지나가는 관광객, 그곳의 사람들,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 등 단순히 장면이 아닌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장면'을 담을 때 그 장면과 함께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함께 담긴다는 말을 습관처럼 해오면서도 그곳에서는 늘 '나 홀로'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 여행은 나 홀로가 아니라는 점이 특별하다.
아아, 이 장면 그릴 때 그들과 함께였어..!
더 이상 여행 드로잉이 특별할 게 있을까, 그저 습관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특별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배낭여행처럼 아주 작은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떠났던 여행.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트를 하나 들고 간다. 이번에 선택한 노트는 '여행노트'로 팔고 있던 것으로, 한쪽은 유선이고 한쪽은 무선이었다.
그래서 그림뿐만이 아니라, 유선 쪽에는 각종 티켓, 영수증, 스티커 등을 붙이며 그날 하루의 쓴 돈의 정산, 이동수단의 티켓과 걸린 시간, 들린 장소의 흔적들을 그림과 함께 남긴 말 그대로 여행 노트가 되었다.
처음으로 한 여행에서 온전히 하나의 노트를 다 쓰고 돌아왔다.
예쁘게 풍경을 그린 장면도 있었고, 그날 먹은 음식을 그리거나, 묵은 호텔의 한 장면, 이동 수단, 대기 중 등등 다양한 그림의 집합체였고 때문에 여행의 사소한 순간, 느낌, 감정까지도 모두 세세히 기록해 두었다.
하나의 여행에서 하나의 노트 완성이라는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어 가장 특별한 노트로 남아있다.
캐나다 여행 이후에는 티켓과 영수증을 모으는 것이 일상이 되어 일상 드로잉에서도 명함이나 영수증, 티켓 등을 붙이는 게 또 습관화되었다. 그리고 좋았던 기억은 반복을 부르기에 캐나다 여행 드로잉에서 쓰던 노트를 다시 사서 여행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아쉽게도 노트를 다 채우지는 못하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일상생활 속에서 채우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특별한 것이 있다면, 여행지에선 그래도 늘 온전하게 스스로 '다됐다'라고 생각할 때 펜을 놓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단연 날씨 때문. 시도 때도 없이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에 잉크펜이었던 스케치북은 물바다가 되었고, 이를 포함하여 모두 추억이 되었다. "아하하, 이거 봐 다 젖었어" 맞아 그때도 비가 왔었지. 이때도 비가 왔었지, 아아 이 음식을 먹었지, 아 이때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야 돼서 그리다 말았지.
어차피 나의 추억이 될 그림이기에 젖어도 그만, 완결되지 못해도 그만이었다.
새삼, 여행 드로잉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여행.
그밖에 국내 여행도 항상 장면 장면을 남기고 온다.
이제 '여행 드로잉'과 '일상 드로잉'은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는 듯, '여행'은 곧 '여행 드로잉'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