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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는 ‘잘’ 자라고 있나요?

by 달빛기차

집에 쉬고 있는 화분에 토마토 모종 하나를 심었다.

토마토가 열리면 좋고 아니면 조금 아쉬운 정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물 주고, 햇빛이 ‘쓰담쓰담’해줄 수 있는 창가에 두었더니 무럭무럭 잘 자랐다.

작은 모종이 갖은 힘을 내여 힘 것 자라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 “잘하고 있어”라고 칭찬의 말도 간간이 건넸다.


그렇게 토마토를 보살핀 지 며칠 뒤.

그 짧은 사이에 몰라보게 커버린 녀석을 보며 난감해졌다.

자기 키를 감당 못해서 휘청거리는 녀석에게는 지지대가 필요했다. 뭐든 처음은 낯선 일의 연속이라, 온 집안을 뒤져서 준비되지 않은 지지대를 대신할 낡은 목검을 찾았다. 내 허리 높이보다 긴 길이의 목검을 녀석에게 꽂아주었지만, 턱도 없었다. 급한 대로 줄기 끝을 묶어서 벽에 기댈 수 있도록 고리에 걸어주었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녀석을 살펴보니, 키는 큰데 줄기 사이사이 가지와 잎은 피우지 않아 휑한 모습이 마치 위로만 끝 간 데 없이 자라는 갈대 같았다. 꽃봉오리도 피우려 노력은 했으나, 대부분 말라버려 건드리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았다.


목검이 매달린 토마토

‘위로, 위로, 위로’만 외치 듯 키만 키우던 녀석은 더운 여름에 힘이 부치는지 새로 피우는 잎사귀들은 서서히 말라갔다.


흙은 늘 촉촉했고, 줄기도 물을 잔뜩 먹음 어서 건드리면 토마토 특유의 향기를 냈다. 그럼에도 잎에게 나눠줄 여유는 없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찌는 태양에 30도가 넘자 가지와 잎이 없어서 썰렁한 줄기는 녀석을 지탱해 주지 못하고 휘어졌다.

‘토마토도 주인 닮는 걸까?’

토마토가 나와 닮아 보이다니… 어이없지만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크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토마토.

잘하는 것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


독학으로 열심히 그렸던 바다 그림

나는 뭐든 잘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배울 때, 못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면 잘 그려지는 바다만 주구장창 그렸고, 피아노를 배울 때는 잘 친다는 소리에 더 듣고 싶어서 한 곡만 100번 이상 쳤다.

일도 그랬다. 내가 틀리는 것, 실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잘하는 일만 주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잘해야 했다.

그로 인해 서서히 숨구멍이 말라 붙어가도, 그래서 소리조차 낼 수 없어도 그래야 했다.


‘잘’하면 좋다. 그런데 누가 좋은 거지?

‘잘’은 타인의 평가다.

타인의 ‘잘했다’는 말이 고파, 내 열정을 연료 삼아 나를 갈아버렸고.

덕분에 ‘잘’한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졌는가? 만족하는가?

그럴 리가, ‘잘’은 개미지옥이다. 사막에서 마시는 물처럼 아무리 들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항상 ‘더, 더, 더’를 외치며 나를 갈아대다 토마토처럼 줄기만 키워 댔다. 중요한 잎을 무시하고, 소중한 꽃봉오리들을 시들게 만든 채로.


어느 날 “너무 잘하셨어요”라는 말에,

“아- 이거 쉬워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J 씨가 하면 나보다 더 잘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나의 가치와 노력을 무시하는 나를 보며 알게 됐다.


나는 ‘잘했다’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한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나에 대한 신뢰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도 밑 빠진 독처럼 ‘잘’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잘해. 너무 잘해왔어.”

“그런데 못 해도 돼. ‘잘’할 필요 없어.”

“그래도 널 사랑해.”


오랜 사회생활에서 배운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가?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제 내게 다시 말해 줍니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가? 지금을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오늘을 잘 보내고 계신가요?

그럼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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