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최 Dec 19. 2023

세상에 없던 연대를 위해.

복약안내서의 말_ 에필로그

     저는 주기적으로 환자와 깊게 만납니다. 치료를 시작하는 처음, 진행하는 중간, 마무리하는 끝까지 주기적으로 고정된 상담 시간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스치며 체크하는 날은 많지만 각 잡고 앉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남아있는 증상은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상담의 시간은 소중하지요.


     맨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에는 누구와 시작하든 우리는 '질병'이라는 하나의 전투에 참전한 전우애로 뭉칩니다. 복약안내서는 후방을 지원하는 제가 격전지에서 직접 전투를 치러야 하는 전우에게 보내는 전략설명서이자 응원의 메시지입니다. 전략은 처음부터 성공할 때도 있지만 가끔 대대적인 수정을 거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전략으로 전환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상황을 공유하고 변화를 포착하여 대처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전투는 때로 성공하고 가끔은 지지부진합니다. 대체로는 이기지만 국지전에서는 패배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자리에 남아 다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지 점검하며 서성이기도 합니다. 


     마무리 상담을 할 때에는 그래서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어떤 전쟁은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되지만 어떤 전쟁은 고지를 눈앞에 두고 현실적인 이유로 중단되기도 합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순간도 있고 치료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가 어떻든, 마음을 다해 한 시기를 함께 싸워온 전우와 참전의 결과를 놓고 마주 앉으면 어쩐지 눈물이 핑 돕니다. 


     마무리를 앞둔 그 순간만큼은 전우가 아니라 '굿바이'를 준비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기분이 듭니다. 전쟁을 끝낸 이후에 남아있는 후유증에 시달리지 말기를, 아직 끝나지 않은 전투를 혼자 무사히 치르기를, 내가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말기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두 번 다시는 같은 전쟁을 치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떤 날은 저도 울컥하고 환자도 울컥합니다. 우리는 상담하다 말고 같이 코가 빨개집니다. 







     처음부터 인류애가 넘쳤거나 특별한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의사의 진료는 증상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는 일이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이해하고 삶의 고난과 살아온 이력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제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면 할수록 누군가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확장됩니다. 가끔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저 진료일뿐일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달 초, 꽤 먼 지역에서 내원해 주셨던 어떤 환자분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약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처음 상담을 막 끝냈을 뿐인데,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뭔가 해소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상담 중에 짚어주신 어떤 부분이 너무 크게 와닿아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몸과 마음이 너무 편안했습니다. 한의원 진료를 보았을 뿐인데 왜 심리 상담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저는 심리 상담사도, 정신과 의사도 아니지만 한의사로서의 제 역할 안에 분명 그러한 느낌과 닿아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1백 퍼센트의 치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저의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위로, 공감, 심리상담, 플라세보,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상관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치료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면요.


     나의 진료가 누군가의 삶에 '공감'이 될 수 있을까. 

     나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고민에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지어준 한약이 치료를 넘어 아픔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와 환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없던 연대를 지금 우리의 진료실에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달과궁 프로젝트 실전 편 - 복약안내서의 말> 1부는 여기에서 마무리됩니다. 2부는 바로 이어서 새로운 연재 브런치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1부의 글은 진료실에서 만나는 대표적인 질환이나 건강에 관한 화제를 중심으로 주로 환자분들께 드리는 말씀을 이야기하듯 정리하였습니다. 이어지는 2부는 연장선상에서 실제로 제가 보냈던 복약안내서를 공개해도 좋은 내용을 중심으로 각색하여 연재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 질환에 대한 이해나 관리의 팁, 체질에 따른 생활의 안내도 담아보려 합니다.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이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내용들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분의 건강한 삶을 응원합니다. 




     

이전 19화 방광의 말할 수 없는 비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