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어디까지, 이 삶의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까
사람은 닫힌 둥근 고리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질주한다.
어느 여름날 만난 시 쓰는 그녀는 내 삶은 실패한 삶이라고 말했고, 지난봄에 회복된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현재의 모습과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과거로 달려간다면 이야기를 완벽하게 바꾸어 가장 이상적인 나의 모습대로 현재의 삶을, 상상한 미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완벽하게 아름답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현재의 나에게 성실하며 진실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떤 아름다운 삶은 실패가 필요조건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완성해 가는 것은 불완전한 하루하루의 실패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이다. 완벽한 매일매일을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어떤 날은 사랑과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고, 어떤 날은 좌절과 결핍과 잃어버린 것들과 부끄러움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떤 하루의 실패 없이 더 나은 나를,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은 완벽한 하루를 산 듯 하지만, 홀로 있는 저녁 무렵에 내면에는 작은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문득 슬프거나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니 성실히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와 땀과 인내, 그리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자신이 가진 최대 에너지를 동력으로 끝까지 달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든 달린다. 아침이나 오후에 헬스장에서 공원이나 호수 근처에서 생존 달리기를 하며 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아프고 나서 매일 달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 달리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삶을 향한 무한한 욕망이며 의지이다.
몇 해 전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 고향집에 가는 길이었다. 대관령을 넘어갈 때 즈음 짙은 안개가 끼어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말 타고 달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고속도로변 쪽에서 말을 타고 달렸는데,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검은 말을 타고 금세 고속버스를 앞질러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처럼 능숙하게 말을 잘 탔다. 고삐를 쥐고, 말이 달리는 속도와 리듬에 맞춰 몸이 힘차게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말은 앞서 달리던 고속버스와 자동차들을 앞질러 달렸다. 나는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는 언뜻 과거에서 온 사람 같기도 하고, 시간 여행자 같기도 했다. 그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곳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만치 꼬리만 흐릿하게 보이다가 마침내 달리는 말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고속버스나 자동차들은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남쪽 어느 바닷가 마을에 며칠간 머물며 여행을 가는 길이었을 테고,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거나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 테다. 모두가 각자 도착할 다른 행선지로 달리고 있었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 나는 이 길의 유한성을 잠시 잊게 되었다. 언젠가는 끝에 도달하겠지만, 안개 속을 계속 달리다 보면 길이 끝날 것 같지 않아 금세 무한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무한에는 한계가 없다. 경계도 없다. 안과 밖도 없다. 무한을 사는 사람은 달리면서, 마침내 생각한다. 안개 속의 풍경을 지나 나는 나의 어디까지, 이 삶의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까.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지평선 너머로 더 멀리 가면 갈수록 삶은 더 고유하고 유일한 어떤 것이 된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그런 삶의 풍경들! 누군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 자기 삶의 운명이라는 둥근 고리 안에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안개가 걷힐 때 즈음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게 만든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한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 여기까지가 나의 삶이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한계를 정해 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 살게 되더라도 영혼은 내면에서 무한을 향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삶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인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중일뿐인 거라고. 내성적인 이 삶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 중인 거라고. 삶은 다시 시작될 거라고. 그 믿음으로 말을 타고 끝까지 달리는 용기가 지금 필요한 것뿐이라고. 어떤 영혼은 작은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오래전에 야생에서 태어나 자연이 베푼 삶의 풍습들을 세대에서 세대로 물려주며 살아가는 몽골인들의 삶에 매료된 적이 있다. 초원 위에 세운 게르에서 따뜻한 수차를 마시는 사람들. 오르혼 계곡의 강가로 몰려드는 양 떼들과 함께 강가 근처에 터를 잡고 사는 순박한 사람들과 볼이 발그스레한 아이들. 어미 잃은 새끼 낙타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마두금을 타며 다른 어미 낙타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초원 위에 뜬 무지개와 소금 호수에서 캐낸 소금을 먹고사는 사람들.
몽골 아이들과 어른들이 말을 타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드넓은 초원을 달리는 풍경은 아름답고 원시적이었다. 그곳에는 초원의 향기와 바람과 구름과 풀씨와 작은 열매들, 그리고 자유롭고 오묘한 삶의 풍경이 있었다. 아이들은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말 타기부터 배워 여섯 살이든 아홉 살, 열두 살이든 말을 잘 탔다. 말 타기 시합이 시작되면 채찍을 휘두르며 아이들은 힘차게 질주했다. 먼지를 휘날리며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질주하는 말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어떤 곳을 향하는 것처럼 그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내달렸다. 어떤 풍경은 질주하는 말의 뒷 배경으로 점점 멀어져 갔고, 어떤 풍경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다가 금세 지나갔다. 아이들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와 속도를 넘어서려는 듯이, 바람을 가르며 오직 질주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삶에는 영원에 관한 법칙이 있다. 오래 질주하며 삶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고,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사람은 유한한 삶을 조금 연장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하지만 할 수 없고, 아무리 달려도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으며, 잃어버린 과거의 풍경들이 있고, 어느 아름다웠던 한 때를 기억하지만 잊힌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끝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먼 과거의 사람이면서 먼 미래의 사람이었다. 소녀 적 도내 육상 대회에 나가 600m 달리기 경주에 참가했지만 꼴찌를 한 나를, 도저히 키가 크고 체격이 월등한 선수들을 제칠 속도와 힘도 없던 나를, 자전거를 타고 우물가를 돌아 마을을 달리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복사꽃 향기를 맡으며, 바람을 가르며 무한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을 지나 여자아이가 도착한 가능한 미래에는 시인의 삶이 있었다. 이제 겨우 이만큼 온 것이다. 이만큼 와서 이만큼 삶을 조금 넓힌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 아이들처럼 지평선 너머 아득한 곳을 향해 질주하며, 이제 자기 앞의 생에 무엇이 가능할까를,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사랑도,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고, 이 삶이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헬스장에서 혹은 공원에서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나도 부지런히 매일 아침마다 달린다. 달리는 일은 존재의 지평을 넓히고, 삶을 넓히며 자기만의 서사시를 부지런히 써내려 가는 일이었다.
무한히 펼쳐진 밤하늘에 흩뿌려진 빛나는 별들. 몽골 초원의 밤이 지나면 아침이슬이 내린 초원의 땅에 첫 발을 내딛고 말에 올라타 달리는 한 사람의 풍경을 떠올린다. 드넓은 초원은 끝이 없다. 무한은 신의 몫이고, 한계는 인간의 몫이어서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도, 지평선 너머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내 삶 전체를 조망할 신의 눈도 없다. 달리다 보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도착할 때가 오지 않을까.
신의 눈동자 안에서 나는 바람에 날리는 작은 풀씨 한 알만 같겠지만. 이 생을 믿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