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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멍난 숟가락 Feb 02. 2018

러시아 양꼬치

다른 고기로도 충분하지만...

대학 때 괴팍하기로 유명한 선배가 있었다. 10학번은 위였고, 술자리에서 때때로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재떨이 집어 던지기. (이것도 술집에서 흡연이 허용되던 시절의 일이니까... 꽤 오래 전이다.) 어쩌다 한 자리에 앉게 됐다면 모를까, 일부러 만날 일이 있을까 싶던 선배에게 일 때문에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게 됐다.      


약속 장소는 선배가 종종 혼술과 혼밥을 한다는 동대문 러시아 골목의 어느 술집. 도저히 혼자 나가기는 멋쩍어서 동기 한 명을 대동했다. 가게 안에서는 묘한 이국의 향신료 냄새가 났다. 메뉴판은 온통 양고기 요리 천지였다. 선배는 이건 꼭 먹어야 한다면서 양고기 스프와 양꼬치, 그리고 러시아 맥주를 주문했다.      


양고기 스프는 양이 엄청났는데, 반쯤은 양기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잘못 먹다가는 입천장이 홀라당 까질 것 같았다. 거기다가 양꼬치의 비주얼은 어마어마했다. 명절 때 산적을 꿸 때 쓰는 그 꼬치, 닭꼬치 집의 앙증맞은 그 기다란 이쑤시개와는 차원이 달랐다. 러시아 대륙을 말달렸던, 어느 장군의 칼집에 꽂혀 있는, 검을 쓱 뽑아온 것 같았다. 거기다 주먹만한 양고기를 척척 꽂아 넣어 완성한 것이 그 집의 양꼬치였다.     


정말이지 부담스런 외관이었다.      


도수가 꽤 높은 러시아 맥주 탓인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양꼬치를 빼먹긴 했다. 양기름이 둥둥 뜬 스프도 한 숟갈 맛보았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는 거의 없었고, 생각보다 꽤 먹을 만했다. 게다가 선배 역시 예상 밖이었다. 괴팍하던 시절에서도 꽤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예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굳이 선배를 만나야 했던 “일”은 그냥 접어야 했다. (그 일이라는 건, 괴짜들을 인터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다시 양고기를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선배는 당혹스럽게도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가 전에 양꼬치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 또 사주려고.” (대체 내가 얼마나 맛있게 먹었길래!!)

나는 극구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배. 전 소, 돼지, 닭이면 충분해요. 굳이 양까지 먹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 후에도 양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소, 돼지, 닭이면 충분하지 굳이 양까지 먹어야 하나. (소, 돼지, 닭아, 미안!)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언니는 “내가 한 양갈비를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었다. 언니가 멀리 사는 관계로,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작년 봄, 드디어 언니 집에 가게 되었다. 언니는 내가 간다는 소식을 알리자마자 양갈비 얘기부터 꺼냈다. “네가 오면 이번에 꼭 양갈비 구워줄게!”     

언니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들은 말은 “가기 전에 양갈비 먹어야 하는데…….” 였다. 그러다 슈퍼에서 민트잎을 발견한 어느 날이 디데이가 되었다. 언니표 양갈비는 오븐에 구운 양갈비를 민트소스에 찍어먹기 때문이었다. 시판용 민트소스로도 충분하지만, 언니는 내가 좋아한다면서 싱싱한 민트잎을 샀다.           


그래도 양갈비라니.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오븐에 익어가는 양갈비 냄새를 맡은 순간, 나는 직감했다. 분명 언니 말이 맞을 거라는 걸. 그리고 내가 많이 먹을 거라는 걸.      


식탁 위에 후라이팬째 양갈비구이와 플레인 요구르트에 민트잎을 잔뜩 다져넣은 민트소스가 놓여졌다. 양갈비는 야들야들했고, 그 느끼함은 민트소스가 꽉 잡아주었다. 하나 먹고, 또 먹고…… 양에게 미안한 마음은 어느새 멀리 날아가버렸다. 세 개 먹고, 네 개 먹고……. 나중엔 형부가 자기 몫까지 내 접시에 얹어주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음식을 챙겨주는 순간을 무척 좋아하므로, 사양하지 않았다. 과연 언니가 만든 양갈비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맛이었다!      


게다가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건, 사랑하는 언니 가족들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양갈비를 뜯는 귀여운 조카들과가족들을 챙기며 맛있게 먹는지 살피는 언니. 그리고 맛있게 드시는 와중에도 본인의 양갈비를 내 접시에 놓아주던 형부. 행복한 식사였다.      


이쯤되면 나와 양갈비의 궁합이 잘 맞는다 싶겠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소, 돼지, 닭이면 충분하지. 굳이 양까지 먹어야 하나? 양갈비 굽는 냄새를 맡는 순간, 또 다시 양고기 마법에 걸리고 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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