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는 먹되 쓰러뜨리지는 말아야
여럿이 케이크를 먹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여러분도 있으시지요?) 케이크는 언제 먹어도 좋지만 특히 나른한 오후에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케이크를 먹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몇 조각의 케이크를 몇 명이서 먹느냐. 그리고 그 몇 명은 나와 어느 정도의 친분을 갖고 있느냐. 친한 사이라면 별로 거칠 것이 없다. 편하게 맘껏 먹되,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일은 없도록) 상대방과 적당히 속도를 맞추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상대와 먹을 때다. 가령 함께 일한 지 며칠 안 된 직장동료라든가, 친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과묵하기까지 한 부장님이라든가. 발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고 싶어지는 직장 상사라든가. 아무튼 그런 상대와, 그 중 둘 혹은 전부와, 단 한 조각의 케이크를 앞에 두게 되었다면! 그때는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끼룩끼룩.
그렇다. 이것은 갈매기 소리다. 그 친분이 미미한 멤버 그대로, 장소를 살짝 이동시켜보자. 이곳은 어느 바닷가 모래사장. 우리 앞에 놓인 건 한 조각의 케이크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은!! 한 무더기의 모래 무덤. 정상에는 깃발이 하나 꽂혀 있다. 이쯤이면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다소 친분이 없는 상대와 케이크를 먹을 때는, 마치 모래놀이를 할 때와도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모래를 가져가긴 가져가되, 정상의 깃발을 쓰러뜨리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그러니까 케이크를 먹기는 먹되, 케이크를 쓰러뜨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크에는 깃발이 꽂혀 있지 않으므로, 대충 장식으로 얹어진 작은 초콜릿 조각을 깃발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초콜릿 조각이 없을 때는 대충 저기 꽂혀 있겠구나 하고 상상의 깃발을 꽂아도 좋을 것이다.)
이제 알았으니, 다시 장소를 카페로 옮겨보자. 우선 손대신 포크를 이용해서 케이크를 살짝 쓸어내린다. ‘첫 술에 배부르랴?’ 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단,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야 하지만. 여럿이 먹을 땐 점점 먹는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므로, 처음에 크게 한 입 떠먹는 게 좋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된다. 케이크에는 상상의 깃발이 꽂혀 있다는 걸 잊지 말라.)
아마 처음에는 다들 맛은 보려고, 한 포크씩 하실 거다. 그러고 나면 케이크는 한 절반 정도가 남게 되겠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케이크를 먹고 있는지 아닌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먹되, 케이크를 먹는 빈도를 서서히 줄여나간다. 혹시라도 먹다가 나 혼자 다 먹는 게 아닌가 싶어 급 소심해져서 이렇게 물어서는 곤란하다. “먹어도 될까요?” 초조함 노출은 절대 자제하고, 포크는 절도 있게 움직여야 한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케이크는 무너질 것이며, 당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케이크를 혼자 먹어야 하거나, (혼자 케이크를 다 먹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포크를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남은 케이크 조각을 아까워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케이크가 무너지려는 찰라 그냥 확 입에 넣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그리하여 케이크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언제나 이렇다. 케이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에는 케이크에 대한 내 로망이 잘 표현되어 있다. 때는 겨울. 아마도 크리스마스 무렵인 것 같다. 아내 그리고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주인공은 케이크 가게에서 몇 개의 조각 케이크를 산다. 집 근처 놀이터에는 아내와 개가 주인공을 마중 나와 있다. 마침 눈이 온다. 두 사람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케이크를 먹는다. 포크는 필요 없다. 한 사람에 한 조각씩. 손에 들고 맛있게 베어 먹는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것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 것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조각을 온전히 먹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