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스무살
기현의 생활은 곧 규칙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자취방을 학교 바로 앞에 얻다 보니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수업 중간중간에 비는 시간은 주로 동아리방에 가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저녁이나 공강인 날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생활비정도는 벌 수 있게 되어 크게 쪼들리진 않았다. 학비와 월세를 지원해 준 부모님에게 문득문득 감사한 마음이 들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할수록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기현은 <Blue Train>이라는 재즈연주 동아리의 일원이 되었다. 윤정의 손에 이끌려 엉겁결에 가입하게 된 기현은 점점 그곳이 주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 이후에도 동기들의 권유로 다른 동아리들도 가보았지만 여기만큼 그냥 나를 내버려두는 곳이 없었다. 기현은 무관심이 좋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먼저 다가서야 나와 타인이 연결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내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나는 그대로 병풍처럼 얼마든지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한낮에는 자취를 감출 무렵, 기현은 블루트레인의 신입생환영회로 가평으로 여행을 떠났다. 가족을 떠나 성인이 되어 처음 떠나는 여행이었다. 이런 일에 능숙한 듯 동아리회장형은 착착 일을 해내었다. 동아리방 앞에서 40인승 버스를 타고 가평으로 떠난 버스는 남이섬이라며 그들을 내려주었다. 잠깐 졸던 기현은 회장이 마이크 잡고 이야기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카톡방에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신입생환영회 목적지인 남이섬에 다 왔습니다. 내리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강촌닭갈비로 들어가서 앉으시면 되고, 가급적 신입생이랑 선배들이랑 섞어서 앉아주세요. 아 그리고 버스는 우리를 내려주고 내일 우리가 남이섬에서 나왔을 때 다시 돌아오니까 짐은 꼭 챙겨서 내리세요. 그리고 영규 ”네 “ 호철이 ”네 “ 동훈이”네 “세명은 나 좀 도와서 고기랑 술좀 내리자. 일단 내리기만 하고 들고 가는 건 다 같이 들고 가자”
일사불란한 회장의 지시로 사람들은 질서 정연하게 버스에서 내려 닭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단체예약으로 준비가 된 듯 식당에는 동아리원들을 위해 미리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기현은 식당에 들어가 어디 앉아야 되냐는 눈빛을 선배들에게 보냈으나, 그들도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하는 수 없이 기현은 제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 선배 안녕하세요"
윤정이 기현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기현을 블루트레인에 이끌고 와 가입하게 한 뒤, 윤정은 통 동아리방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기현은 공강 때마다 별 일이 없으면 동방에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근 몇 주간 윤정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기현은 윤정을 만나면 '선배 저한테 왜 동아리 같이하자고 했어요?'라고 물어볼 참이었다.
"어때 동아리 생활은 좀 적응됐어? 적응했으니까 이렇게 여기에 같이 왔긴 하겠지만(웃음)"
"네.. 제가 A형이라서 좀 내성적인데 여기는 딱히 저한테 부담스러운 관심을 안 주셔서 편해요. 그래서 그냥 어쩌다 보니.."
"그래 그게 우리 장점이자 단점이야. 너무 사교적인 친구들은 금세 실망하고 떠나더라. 보통 50명 정도 신입생이 가입신청을 하면 일 년 뒤쯤 되면 열명이나 남아있을까? 늘 그래"
"아 그렇구나.."
"같이 들어온 동기들이랑은 좀 친해졌어?"
"그게.. 사실 누군지도 잘 몰라요. 동아리방에서 조용히 지내다 보니 아직 얼굴만 익숙하고 이름이 뭔지 몇 학번인지 잘 몰라요.."
"잘됐네, 신입생환영회에서 원래 그런 거 하는 거니까 이번 MT이후로 많이 친해지게 되겠다! 나랑도 더 친해지고(웃음)"
'나랑도 더 친해지고..?' 기현은 윤정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나를 동아리에 가입하게 만들어놓고 못 챙겨서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한 소린가? 아니면.. 선배로서, 같은 동아리원으로서 잘 지내자는 이야긴가? 그것도 아니면...
"먹자 다 익었다."
"맛있게 드세요"
잠깐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 사이 닭갈비는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솔솔 뿌려졌던 치즈는 금세 닭갈비와 어우러져 마치 이불을 덮은 것처럼 폭신해 보였다. 기현은 녹아내린 치즈처럼 나도 대학생활에, 동아리생활에 잘 녹아들 수 있을지 걱정됐다. 이번 MT를 계기로 조금은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꿔봐야겠다는 결심도 들었다.
닭갈비를 먹으며 윤정과 기현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윤정이 물어보고 기현이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윤정은 기현과 다르게 꽤나 외향적인 성격인 듯했다. 기현은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뭐라도 윤정이 물어보지 않으면 말없이 어색하게 밥만 먹었을 듯싶었다.
윤정은 3월 동안 학교를 거의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가족일 때문이라고 했다. 중요한 수업들도 몇 번 빼먹었다고 했다. 어디 다녀왔냐는 기현의 질문에 아버지 사업 때문에 파리에 잠깐 다녀왔다고 했다. 기현은 불현듯 낯설었다. 윤정과 나는 정말 다른 세계에 사는 듯싶었다. 더 물어볼 것들이 많았지만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웠다. 그래도 MT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가슴 한 구석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