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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Oct 21. 2019

엄마, 한약은 다 미신이야 안먹을래

난임 일기. 내가 한의원을 믿지 않게 된 이유

서른이 넘어서 결혼을 하고 독립도 했는데, 나와 엄마는 여전히 종종 투닥거린다. 엄마랑 그만큼 가까워서가 첫 번째 이유이고, 그럼에도 엄마와 내가 성격적으로 극과 극에 있어서가 두 번째 이유다. 나는 자라나면서 쭉 성격이나 취향이나 아빠를 많이 닮았고, 남동생은 엄마를 닮았다. 그런데 우리집 서열은 아빠 한참 위에 엄마가 있다. 늘 엄마가 무언가 주장하면 동생은 물어보지 않아도 엄마와 생각이 같았고, 아빠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엄마 의견에 동의했다. 나는 항상 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젠 친정 집에 있는 게 아니니까 '엄마+아빠+동생 vs 나'의, 나 혼자 손해보는 (?) 구도는 아니다. 엄마와 나의 대화는 대부분 카톡이나 전화 통화를 통해 1:1로 이뤄지는데, 보통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일보다 엄마가 나에게 바라는 일이 많다 보니, 나는 엄마의 요구 사항들을 내가 원하는 만큼만 취사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난임 치료로 고생하는 딸래미가 자나깨나 걱정되는 엄마. 시험관에 관해서는 스트레스 안 받고 혼자서 편하게 진행하고 싶은 딸. 언젠가부터 내가 엄마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엄마,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약에 관한 문제였다.



늘 문제는 엄마 친구 딸들이었다. 이번에 엄마 친구 딸 한 명은, 일 년동안 계속 임신이 되지 않았는데 한약을 먹자마자 바로 그 다음 달에 아이가 들어섰다고 한다. 엄마 친구 딸이 약을 지은 그 한의원이 상당히 용하다고 했다. 엄마는 카톡으로 여러 번 나를 설득했다. 그 '용한' 한의원에 대해 들을 때마다, 나는 '용한' 점집이 떠올랐다.


"그 집이 귀신님이 내려와서 그렇게 잘맞힌다더라."

"내 친구 딸이 결혼 날짜가지 잡은 상태에서 그 집에 점을 보러 갔는데, 남편될 사람 주위에 여자가 너무 많이 보인다고 극구 말렸다지뭐야. 그걸 무시하고 결혼식을 올렸는데 글쎄 그 남자가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바람을 폈더라구요."

"어머어머."


한약만 먹으면 바로 임신이 된다는 한의원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이런거였다.



사실 한의원에 한 번도 안 가본건 아니다. 시험관 시술을 한 번 실패했던 초기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본 적 있다. 방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새벽부터 접수해서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엄마가 아침 일찍 먼저 가서 번호표를 받았고, 그렇게 받은 예약 시간 오후 2시에 맞춰 나는 서서히 출발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엄마에게 철 없이 볼멘 소리를 했다.


"이런 거 다 소용 없다고."


대기실에서 20분을 더 기다리고 겨우 엄마와 함께 들어간 진료실. 별명이 삼신 할머니라는 유명한 원장 선생님은 내 난임 이력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몇 개 던지더니 내 손목의 맥을 가만히 짚었다. 5초 정도 지났을까.


"자궁이 차네요. 그러니까 착상이 안되죠. 한약을 먹고 자궁을 따뜻하게 해줘야해요."


대략 그런 결론이었다. 새벽부터 번호표를 받았는데 진료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찰나의 진맥으로 확인한 내 자궁의 온도는 30만원어치의 한약을 지어먹어야 할, 이해할 수 없는 근거가 되었다. 내 친구들을 미스테리 쇼퍼*로 가장하여 그 한의원에 보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비스나 품질에 대한 정보를 캐려고 손님을 가장하여 매장에 방문하는 사람) 나 말고 아무 문제 없이 자연 임신을 한 친구들은 자궁이 따뜻하다는 진맥 결과를 들을 수 있었을까.


물론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약을 지어 먹었고, 하루 세 번 핸드폰에 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한약을 데워먹었다. 그 다음 시험관 피검 수치는 또 0.002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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