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냉이의 저주
그때 나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내 원래 억양인 경상도말로 발표 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말을 써 볼 것인가. 3월, 갓 입학한 새내기가 대학생 인생 처음으로 강의 중에 발표란 걸 해보겠다고 손을 든 참이었다.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날 지목했다. 300여명 학생들이 한꺼번에 날 쳐다봤다. 나는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다. 내 대학 생활을, 아니 이후 삶 동안 사용 될 억양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블루베리 스무디’는 한때 온라인에서 유행한 사투리 유머다. 아무리 서울말에 능숙한 경상도 사람이라도 ‘블루베리 스무디’를 발음할 때만은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온다는 거다. 사투리의 놀라운 다양성에 관한 유머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이 스무디 유머만큼은 어쩐지 실눈을 뜨고 보게 된다. ‘경상도 사람의 서울말 능력치’를 확인하는 듯한 측면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솔직히 블루베리 스무디 따위 서울 억양으로 말하는 거 문제도 아닌 (거의) 20년차 서울 생활자다. 그런 나라도 너 경상도 사람이지? 블루베리 스무디 해 봐! 라고 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망부석처럼 서 있게 될 것이 뻔하다. 씁쓸한 얼굴로 지난 인생을 반추하며 말이다.
아무에게도 나쁜 의도는 없다. 당신의 경상도적(?)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겠다거나, 서울 사람인 척 하는 건방진 태도를 바로 잡아주겠다거나 하는 음습한 의도로 ‘블루베리 스무디 해 봐’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비수도권(서울말로는 ‘시골’) 출신 서울 거주자들에게 물어보자. 살면서 웃어 넘긴 자기 사투리에 대한 각양각색의 서울식 반응 중에 무례라고 느낀 것이 있었는지. 많았는지, 혹은 엄청 많았는지.
이런 식이다. 평생 서울에서만 살아 온 어떤 사람과 경상도 사람인 내가 대화를 한다. 내가 점잖고 지적인 단어를 써 가며 내 의견을 피력하는 와중에, 상대방이 "서울말 잘 하시는데, 그래도 사투리 억양이 남아있네요" 라고 말한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칭찬인가? 그리고 고민한다. 나와 마주 앉은 저 사람, 서울말 경찰인가? 만약 내 억양에서 '문제'를 찾지 못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투리를 완벽히 고치셨네요”. 칭찬인 거 같다. 그래도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저도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해 볼까? 아니면 "에이, 뭘요" 라고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여 볼까. 의심스러워 여러 번 반추해도 여지 없이 가장 많이 접한, "귀엽다"는 반응은 정말이지 싫다. 당신은 저를 귀여워할 만큼 나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짚어줄까 말까 고민하는 새에 대화가 끝난다. 참고로 나는 진짜로 귀여워 보이고 싶을 땐 서울말을 쓴다. 되도록 모르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말해두지만 나는 내 사투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특별한 애정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냥 보통의 서울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도로 사투리를 좋아한다. 출신지 경상도 외의 다른 지역 사투리를 듣는 걸 좋아하고, 영화나 드라마의 사투리 명대사를 재미 삼아 연습해 보기도 한다. 내가 싫은 건 내가 원치 않는 순간에 사투리로 주목 받는 일이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그 수업 시간에 첫 발표 때 쓸 언어로 ‘서울말’을 선택한 이유다. 나는 발표 내용으로 주목 받고 싶지, 사투리 쓰는 여학생으로 주목 받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냥 그런 단순한 이유였을 뿐이지만, 발표를 끝마치고 자리에 앉을 때 느꼈던 미세한 굴욕감과 남 모를 수치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별 소속감도 없는 고향을 배신했다거나 정체성을 버렸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남들한테 어떻게 보일지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내 자신이 너무 어설프고 모자라 보여, 자존심이 상했던 거다.
지금은 ‘완벽한 서울말’을 쓰는 일에도, 서울 친구들 앞에서 사투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일에도 불필요한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동향 친구에게 서울말을 써야 할 지 진주말을 써야 할 지 고민 하는 때 외엔 내 억양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때때로 갸우뚱하다. 서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의 억양에 관심이 많은가. 정작 지방의 구체적인 사정에 대해선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면서. 서울에 큰비나 큰불이 나면 전 채널에서 온종일 재해 방송을 하지만 지방에 떨어지는 우박은 마치 먼 나라 얘기처럼 보도하면서.
참고로 이건 어디까지나 서울 사는 경상도 여자의 관점이다. 서울 사는 경상도 남자들은 억양을 ‘교정’하지 않는다. 딱히 지적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인데,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이 말씀하시는데 “각하, 사투리가 귀엽습니다” 할 순 없는 노릇인 거다.
*글과 전혀 상관없는 헤더 이미지는 독일 일러스트레이터 Cor Blok의 60년대 독일판 '반지의 제왕' 일러스트. 작가는 4월 19일에 세상과 작별하셨다 한다.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