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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Mar 05. 2022

그녀의 가출 편지

- 진짜 집이 나가고 싶었던 건 아녜요 -


저녁 먹으라고 아이를 불렀다. 잔뜩 골이 난 채 쿵쿵거리며 와 앉더니 손과 머리로 종이를 가리곤 뭔가를 쓴다. 수저 들 기미가 안 보여 밥에 반찬을 올려 입에 넣어줬다. 몇 입 받아먹는 새 다 썼는지 엄마 편지! 라며 종이를 건넨다.


"엄마 아빠 저 이제부터 할머니 집애서 살거애요. 김따님 올림"


아니 무슨 가출을 예고하는 편지가 다 있나. 이제 8살인데 벌써? 황당하기 그지없다. 글씨도 삐뚤빼뚤 잔뜩 화가 나있다. 따님이 여태껏 혼자 열심히 심각하게 쓴 편지는 하나같이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지난 설 연휴, 옆 단지 할머니 댁에서 우리 집까지 혼자 오기에 도전한 게 화근이었나. 할머니는 주양육자나 마찬가지에, 할아버지는 2년간 매일 유치원 등원을 시켜주셔서 그런 건가. 생각이 많아진다. 방에서 혼자 투당탕 하길래 가봤더니 장난감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다. 야무지게 잘도 챙긴다. 아이고, 머리야.


어디까지 하나 볼 심산으로 내버려 뒀다. 본인한테 제일 중요한 애착 조끼, 수면등, 인형을 챙기고 나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아이를 안고는 뭐가 그리 서럽냐 물었다. 미술학원에서 언니 오빠들이 자기만 다른 초등학교라고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게 속상했다고 답한다. 그래서 자기 학교 이름을 그림에 적었는데 선생님은 낙서하지 말라고 하셔서 서러웠단다. 그런데 집에 오니 엄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하지 말라고만 해 할머니 집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한다.


가뜩이나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오늘따라 여러 가지가 겹쳐 마음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아직 어려서 감정을 다스리는 데 미숙해 한꺼번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는 엄마가 마음을 몰라주니 속상하고 미운 나머지 급기야는 가출까지 결심한 모양이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물밀 듯 밀려온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해주어 고마웠다. 힘들다 괴롭다 속으로만 숨기지 않고 슬프다 이야기해주어 다행이다. 돌이켜보니 할머니 집에 가겠다는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께 위로받고 하소연하고 싶다는 말인 듯한데 눈치 없는 엄마는 전혀 몰랐다. 정말 큰 용기를 내 쓴 편지였 텐데 이 꼬맹이가 벌써 가출을? 이라며 도끼눈을 뜨기나 했다. 엄마 나 좀 봐줘, 투정 부린 모르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을지 상상도 안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딸은 단 한 번도 나한테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나는 사랑한다 말로 뱉을 줄이나 알았지 찬찬히 딸을 살펴본 적이 잘 없다.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 마음을 다치고 혼자 툭툭 털었을 그 시간들이 새삼 아프다. 섬세한 딸과 무딘 엄마의 주파수가 맞을 날이 제발 어서 오길. 그리하여 내 마음의 부채가 좀 덜 쌓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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