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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Mar 25. 2022

왕짜증나는날

- 시위하는 방법도 여러가지 -


아이의 학교에서 준 주간 교육계획표를 살펴보니 목요일에 도서관 가는 일정이 있다. 도서관과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책 한 권 빌려오기 미션을 줬다. 무턱대고 빌려오라면 당황할까 봐 학교생활 길라잡이의 필독도서 목록을 함께 미리 함께 살펴봤다. 개중엔 집에 있는 것도 있고 학급문고로 읽은 것도 있어, 읽지 않은 책들을 확인하며 빌려올 책을 골랐다.

이미 읽었다는 책이라도 아직은 그림으로 보는 게 편한 아이라 내용을 꼭 물어본다. 듣다 보면 좀 이상한 것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내 표정이 묘해지는지 "엄마, 나 사실 이건 제대로 안 봤어."라 이실직고한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학교 이야기도 나누고, 칭찬과 격려, 위로의 시간을 보낸다.

한참 살펴보고 고른 책은 "손가락 문어"와 "바다거북, 생명의 여행" 이렇게 두 권이었다. 영어책도 가져와야 해 무거울까 봐 한 권은 엄마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오겠다 했더니, 자기가 "손가락 문어"를 빌리겠다 정했다. 혹시 잊을까 포스트잍에 적어달래서 알림 주머니 앞에 써붙여줬다.

다음날 오후, 하교해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었더니 책이 한 권 들어있다. 꺼내자마자 제목에 포복절도했다.


못하는 영어 수업도 짜증 나고,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짜증 나고, 그 와중에 책 빌려오라는 것도 짜증 나고, 오늘따라 물통도 놓고 와 목말라서 짜증 나고, 짜증 나는 게 한두 개가 아니라 "왕짜증"이 나셨나 보다. 자기 마음을 책 제목으로 드러내다니 고단수다.

은근슬쩍 "약속한 책 안 빌려왔네?" 라 물으니 그 책은 재미가 없어 보이고 이 책이 재밌어 보여서 빌려왔다 답한다. 제목이 너무 흥미롭다 했더니 자기도 그렇긴 한데 내용이 궁금해 빌려왔단다. 심지어 필독도서 목록 중에 있었던 책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 빌려온 게 더 웃기다.

학교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 중인가 보다. 담임선생님께선 "얘는 초특급 에이스입니다. 회장감입니다. 현재 저의 오른팔을 담당하고 있습니다ㅎㅎ"라는 칭찬의 문자를 보내주셨는데, 그저 잘 지내고 있나 보다 위안 삼았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선 진짜 특이한 아이들 몆몇만 빼곤 모두 최고의 어린이라 불러주셨다. 어쨌거나 남들보다 너무 못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것조차 욕심인 것 같아 자꾸 내려놓으려 애쓰는 중이다.

"왕짜증나는날"은 언제쯤 "짱기분좋은날" 이 되려나.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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