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PLACE-번외편] 애 엄마가 제주도로 MT를 갔다②
아이가 있는 집의 아침은 KBS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처럼 알콩달콩하지도,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다. 결코. 그 순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개판’이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온갖 장난감을 소환하고, 각종 상황극을 연출한다. 우리 집 따님은 주로 아침마다 장난감 병원 의사 선생님이 되곤 한다. 그리고 상황극을 방해하기 위한 전파 공작, 텔레비전이 요란하게 혼잣말을 한다.
이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아침부터 의사 선생님이 된 따님, 출근 준비를 하는 ‘어제의 뽑기 영웅’(1편 참고) 그리고 딸의 등원을 돕기 위해 아침부터 고생 중이신 장모님. 문득 계란을 떠올렸다. 아내는 계란 노른자처럼 영양가 있는 아침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흰자와 같이 머리가 하얘진 상태였다.
우리 집 따님은 잘 때 엄마보다는 아빠를 찾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잠을 자던 버릇이 들어서다. 그런데 아침에는 아빠와 엄마 둘 다 찾는다. 해 떠 있을 때 못 보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1초라도 더 각막에 새겨놓고 싶어서일 듯하다. 만 35개월 아기의 갈구는 나의 출근을 더디게 한다. 돈 좀 벌겠다는 이유로 핏덩이를 똑 떨어트려놓기 미안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다가 헐레벌떡 뛰어나오기 일쑤다.
이날도 마찬가지. 7시 53분에 대문을 나선 나는 “장모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외치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손녀와 함께 집에 남은 장모님은 “김서방, 잘 다녀오게, 늦어서 어쩌나”라고 답해주셨다.
종종걸음으로 버스를 타고 한숨 돌리는데 카톡이 도착했다. 멀리 제주도에서. “여보! 조금 있다가 세연이 등원하기 전에 영상통화 좀 연결해줘. 보고 싶네.” 몸은 수백 km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지근거리인가 보다. 만원 버스 안에서 멋쩍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난 답했다. “방금 버스 탔어요! 장모님께 말씀드릴게.”
예상치 못한 카톡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2분 뒤.
여보, 오늘 휴가 아니었어? 금요일에 휴가 쓰기로 했었잖아.
... 맞다. 아내의 제주도 엠티 두 번째 날에 휴가를 쓰고 집에서 따님을 케어하기로 했었지. ‘뽑기 영웅’의 영광은 한겨울 입김처럼 날아가고 ‘쉬는 날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추락은 한순간이다. 이내 죄책감이 밀려온다. 회사 안 가는 날인지도 모르고 장모님을 아침부터 고생시키다니.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장모님께 휴가 사실을 알렸다. 집 나간 줄 알았던 아빠가 돌아오니 따님은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듯 뛰었다. 장난감 병원 의사 놀이를 30분 정도 더 한 뒤 집을 나섰고, 어린이집에 골인.
점심 즈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발신자를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휴가도 날아가겠군.’ 그는 며칠 전 기고를 부탁했던 한 정치인. 그는 ‘아무래도 기고가 어려우니 전화 인터뷰로 갈음하자’는 것. 눈앞에서 뉴스가 사라지는 걸 방기 하면 그것은 직무유기, 이것은 기자의 운명 같은 것이렷다.
급하게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이 들으면 의아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쉬는 복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상당수 휴가 때 일을 하곤 한다.
기사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 제주도에 있는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봉❤
이 하트는 주로 아내가 내게 뭔가 부탁할 때 쓰는 특수기호다. 그녀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이 특수기호를 쓰지 않는다.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구나.
나 내일 아침 비행기 타고 가도 돼? 오늘 저녁에 못 가겠어. 넘 피곤해잉...
정적 속에 카톡창을 바라봤다. 어떻게 답해야 하나. 안된다고 할까? 그러면 약 한 달 동안의 가정생활은 망가진다. 날씨도 추운데 집안까지 냉랭해질 수는 없다. 답은 이미 나와있다. 긍정이다. 24시간 제주에 더 있는다고 해서 아내가 직무를 유기하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나름 육아로 단련돼 있어 문제는 없다. 게다가 아내는 얼마 만에 자유를 만끽하는 건가. 거기에 찬물을 들이부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긍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였다. 너무 경솔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힘듦이 드러나는 긍정. 아내의 24시간을 응원하면서도 나의 24시간도 인정받았으면 하는 바람.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섞어야 했다. 게다가 시간을 너무 끌면 안 된다. 답장 시간이 늦어질수록 부정의 대답으로 아내가 오해할 수 있으니까.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그래ㅋ” 문장을 입력하고 나서 한참 걱정했다. ‘ㅋ’이 하나라 영혼이 없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ㅋ’이 너무 많으면 가식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 하나만 입력했는데. 세 개는 넣었어야 했나...
따님은 아빠만 덩그러니 있는 집에서 저녁을 보냈다. 밥도 먹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책도 읽었다. 바다 배경에 야자수가 한 그루 서 있는 그림을 본 따님이 물었다.
“아빠, 이거 제주도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건 바다 섬이잖아.”
“아빠, 엄마는 제주도야?”
“웅웅. 엄마는 내일 올 거야.”
“아빠, 우리도 제주도 가자.”
“...”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방 안에서 “엄마! 빨리 와!” 삼창을 함께한 따님과 나는 침대에 누웠다. 따님에게 물었다.
“세연아. 아빠 어제 세연이 새로운 어린이집 당첨됐어. 거기 좋은 곳이야. 세연이도 기분 좋지?”
“아빠, 세연이 잘 거야. 자장가 노래 불러줘.”
“...”
35개월 따님께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바랄 걸 바라야지.
어렵게 든 잠은 금방 깼다. 해가 짧아졌다는데 참 빨리도 오더라. 해는 참 빨리 왔는데, ‘님’의 발걸음은 참 더디게 느껴지더라. 낮 2시께 옆지기와 따님이 상봉했다. 아침도 거르고 날아온 터라 옆지기의 밥상을 차리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2박 3일. 참 길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참 짧았을 것이다. 약 3년 만의 외출. 48시간은 아내의 삶을 어떻게 바꿔놨을까. 옆지기의 광대뼈가 1cm가량 올라간 걸 보니 좋은 인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훈훈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옆지기가 없다고 해서 육아가 망가지는 게 아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내가 있다. 따님은 따님대로 엄마의 부재를 인정했고, 그에 맞춰 아빠와 신나게 보냈다. 그거면 된 거다. 언젠가 내가 자리를 비워도 일상의 톱니바퀴는 서로가 서로를 물면서 원활히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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