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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정치는 종교를 넘어서는 신념

by 문성 moon song

어수선한 시국에도 베트남여행기를 이어 적는다.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베트남 여행이라는 전혀 상관 없는 듯 보이는 둘은 나라는 매개체로 연결되고 중첩된다. 사진으로만 남겨두고 이따금 꺼내보며 흐릿해지는 기억을 되짚는 것보다는 끄집어내어 펼치고 곱씹어보기를 택한다. 글이 말로 푸는 대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경험을 더욱 풍부하고 의미있게 나누는 대화임을 알기에,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어 본다. 나의 여행을 당신만의 속도와 당신만의 방식으로 읽고 당신의 이야기도 건네어 달라고.


당신은 하노이에서 무엇을 볼까. 당신이 하노이에 도착했다면, 무엇부터 하려고 할까. 숙소에 들어가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 든든하게 식사도 했다면, 그 다음엔 무엇으로 일정을 채울까. 현지인들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어할 수도, 주변을 탐색할 수도, 마음껏 길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그곳에서 볼만 한 것이 무엇인지, 명소를 체크하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지 않을까.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한국출판사의 여행책 두 개와 론리플래닛의 목록을 크로스체크하고 그 중 가고 싶은 곳들을 고른다. 일정 내에 소화가능한 곳으로 그리고 다시 동선에 맞는 곳으로 압축. 그곳들에 대한 역사적인 혹은 문화적인 맥락을 인터넷으로 조금 더 알아보고 입장료나 복장과 같은 세부적인 사항을 확인해둔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고 호기심이 있다면, 그곳의 역사나 문화를 다룬 책을 찾아 읽어본다. 이 과정은 베트남과 같은 새로운 문화로 떠나기 전 좀 더 즐거운 여행을 위해 준비하는 거의 습관화된 여행준비방법이었다.

처음 여행을 떠나던 때에는 관광객들이 봐야하는 명소 목록, 편리한 순서로 짜인 일정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싫었다. 초중고를 거치며 주어진 대로 따라야만 하는 생활에 진저리치던 이십대 초반.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깨달았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앞에서 혼자서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현지인들과 많은 여행객들의 경험이 집약되어 관광목록이 되고 여행책에 올랐다는 것을. 함부로 평가하기 전에 그것을 제대로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물론 '보아야할 곳' 목록을 최종으로 결정하는 것은 여행을 하는 본인이다. 결국 그 결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보게 된다. 여러 여행책과 인터넷에서 추천한 목록들에 의지해서 나는 나만의 목록을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문묘와 카톨릭 성당 그리고 호치민궁과 영묘, 박물관은 하노이의 핵심 관광지이자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의 종교와 정치를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문묘는 간단히 소개하자면, 공자의 사당이다. 그렇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사당을 만들어 모시고 그 전통을 유적지로 두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도 유학은 뿌리내려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막강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도 위력을 발휘했고 결국 공산화되고 나서도 살아남았다. 이제는 현지인들에게는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학문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자 해외여행객들에게는 한 번쯤 가볼 만한 문화유적지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후에 호치민 평전을 읽으며 호치민의 아버지 역시, 우리나라로 치면 양반쯤 되는,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쳐 하급관리로 살았던 유학자였고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 역시 어린시절 한학을 공부했지만 무너지는 나라를 위해 다른 길을 택했음을 알았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땅덩어리의 북부와 바다 너머 중국을 마주하고 있고 긴 역사 내내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영향을 받아왔아 온 것이다. 용이 올라앉은 고풍스러운 붉은 기와 앞에서 들뜬 얼굴로 졸업장을 들고 사진을 찍는 풋풋한 모습들 그리고 그들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카메라셔터를 누르는 여행객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겹쳐졌다.

두 번째로, 지난 번 글에서도 소개한, 현지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서도 들리는 카톨릭 성당도 인상적인 곳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북적이는 인파로 둘러싸인 성당은 활짝 열어놓은 문으로 베트남어 강독과 설교가 흘러나왔다. 동방박사와 말구유 속의 예수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모형 아래로 알록달록한 오토바이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주차장이 되어버린 예배당 마당 한 켠에 천주교라는 종교 역시 이들의 일상이구나 싶었다. 프랑스의 지배로 유입된 카톨릭은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공산화의 길을 걷고 이제 막 개방을 시작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도 살아 남아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유교도 카톨릭도 압도하는 무엇은 바로 정치적 신념이 아닐까. 꼬부랑 할머니부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아이까지 온 나라에서 모여든 듯한 베트남사람들과 여러 나라 언어들로 이야기 나누는 해외여행객들의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천천히 호치민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생각했다.

고요한 호수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호치민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건물과 차량과 관련된 기록들, 호치민이 사용했던 소박한 침실을 줄지은 사람들이 통과한다. 누구도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의 일행에게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나누며 그곳을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사진을 찍는다. 그 어떤 유적지나 관광지보다도 북적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곳보다도 차분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관을 피해 옆길로 새서 느긋하게 산책을 하다가 노오란 공산당사 건물과 그 맞은 편에 푸르른 나무들이 반원으로 둘러싼 테이블을 맞닥뜨렸다.

호치민이 누군가를 맞이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자리라고 했다. 한겨울에도 따스한 햇살이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반짝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리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이곳에서의 호치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정작 그는 오랜 시간 베트남 밖을 떠돌아야했고 이곳에 와서도 전쟁과 폭격 그리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서 이곳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을 테지만. 꼭 필요한 집기와 나무 그리고 풍부한 햇살이 있는 그의 공간은 그 어떤 유적지보다도 마음에 남았다.

설사 여기 소박한 그의 공간지도자의 소박함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선전물로 남겨두었을 뿐이라 해도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그의 모습을 선전하지 않으면 무엇을 선전하겠는가, 충분히 선전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본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제해서 사람들이 둘러볼 수 있게 만든 영묘와 압도적인 규모의 그의 박물관을 둘러보며 다시금 의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 갖고 있던 무엇이 이렇게 그를 종교에 가깝게 여기도록 만들었을까.
호치민의 육체의 부패를 막으면서까지 존재를 기리게 하는 정치적 신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어둡고 온도를 낮게 유지해야하는 탓이었겠지만 이미 오래 전 레닌의 영묘에서 느꼈던 서늘함과 오싹함이 되살아났다.

종교보다 더한 신념이 그곳을 만들고 지켜온 것이다.

친근한 호아저씨가 거대한 입상이 되어 사람들 위에 버티고 선 입구를 지나면 그의 흔적들이 베트남의 현대사와 함께 펼쳐지고 나는 그걸 좇으면서 그가 얼마나 추앙받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호치민박물관에서 호치민을 추모하는 방식이 꽤나 모던했다는 것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 대나무, 연꽃과도 같은 상징적인 오브제로 풀어낸 조형물들은 내가 알고 있던 혹은 기대했던 감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북한의 삐라와 선전방송 그것도 한국의 공영방송으로 보아온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운 옷차림의 가무극 따위의 단편만을 상상하고 있었던 걸까. 혹은 한국에서 세종대왕을 이순신을 추모하는 사실은 그들을 빌어 박정희를 추모하는 거대한 인물상이나 그리스나 로마조각의 전통을 따르려 애쓰지만 사실상 따를 수 없음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군상들에만 익숙했던 걸까.

호치민을, 그의 행적과 연설, 기록을 그리고 당시의 베트남과 국제정세를 텍스트와 함께 구성한 시각적 조형물들은 구체적인 상황을 모형으로 재현하는 구상조각이 아니라 색과 구조로 분위기로 전달하는 추상조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당시의 상황과 그것을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구미시에서 수백억을 들여 만든 박정희의 동상, 박정희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로 지은 복원 생가와 거대한 기념공원 그리고 얼마전 박정희동상에 누군가기 부은 빨간색 페인트를 비교해보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호치민이 죽었을 때 세계각지에서 보낸 조기들을 보자마자 당연히 북한에서 보낸 깃발에 눈길이 머물렀다. 낯선 문자들 속에 한글로 써 있는 깃발을 어떻게 읽지 않고 넘길 수 있겠는가. 새삼 당시 세계의 절반이 공산권이었고 우리나라의 일부도 역시 그러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제 호치민박물관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북한에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호치민은 그렇게 종교를 넘어서는, 개인을 넘어 한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꾸기도 하는, 정치적 신념이란 무엇인가 돌아보게 하는 곳이었다. 나는 과연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가 되묻게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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