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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04. 2018

피를 파는 사람들

조정권, 「매혈자들」

1

헌혈이 의미있는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피'를 직접 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중간유통이 포함되지만). 요즘이야 장기기증이라는 더욱 직접적인 방식이 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피를 준다는 것만큼 대단한 기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 조정권 시인의 작품에서 헌혈의 긍정적인 의미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아래에 시가 인용되어 있다.


2

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짓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 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영천靈泉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헌혈[獻血].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피를 준다는 의미인데, 시인은 그것이 피를 파는 행위[賣血]로 보였던 모양이다. 매혈의 논리에서 보자면 피를 사는 입장의 이익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피가 필요했고 피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피를 파는 사람들('매혈자')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현실적으로 보면, 헌혈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사은품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시에서 영화관람권이나 남성용화장품 같은 물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백 원 짜리 국밥"과 "소주 반 병"이 매혈을 끝낸 자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30분 동안 누워서 피를 뽑은 다음 받은 약간의 돈으로 그들은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국밥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이는 나머지 돈으로 소주 반 병(한 병이 아니다!)을 습관처럼 사 마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토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까. 아마도 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피 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이라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삶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을 꿈꾸는 행위 자체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육신에 가둬놓는 영혼의 어둠"이라는 것이 결국은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 억누른 욕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한계는 있는 법. 그 욕망과의 사투에서 패배할 것 같은 순간마다, 그들은 와서 피를 뽑는다.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어두운 욕망을, 자본주의 방식대로 처리한다.


3

서울 출신의 조정권 시인에게 도시의 삶이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도시가 성장(팽창)하는 과정을 목격했을 그에게, 모든 거주민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시계획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 밝은 미래를 꿈꾸며 이주해 왔지만 녹록찮은 도시생활에 좌절했을 사람들. 도시는 그들의 피(생명)를 사서 성장한다. 도시인들은 자신의 피를 팔아서 도시를 살 찌운다.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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