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性’이 되기를 원하는 사회
안으로 끊임없이 수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바깥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 자기 영역의 확장, 재산의 확장, 경력의 확장, 대인관계의 확장처럼 말이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남성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남성의 돌출된 성기는 여성의 몸을 뚫고 들어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위대한 자기 영역의 확장처럼 여겨졌고, 자신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여성은 열등한 존재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없었다면, 자기 영역의 확장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성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칼과 총, 대포와 같이 다른 것을 찌르고 자르고 부수는 ‘남성적인 행위’는 신대륙 발견을 통한 영토의 확장과 식민지 개척을 통한 전 지구적 경제발전의 쾌거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절대적 타자’로 여겨진다.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은 언제나 ‘남성’뿐이었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주체 역시 ‘남성’뿐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고, 나아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온전히 남성의 권한으로 여겨졌다. ‘공적인 영역’은 ‘남성적인 영역’이고, 가정으로 대표되는 ‘사적인 영역’만이 ‘여성의 영역’처럼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생각할 수 있는 ‘여성해방’의 가능성은 ‘남성의 권한을 나누어 갖는 것’이고, 나아가 ‘남성이 누리고 있는 삶을 자신도 누리는 것’이었다. 여성해방의 시발점이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이었을 때, 이는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공적 영역에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마련에도 불구하고, 실생활에서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현대사회에서, 소수의 권리와 의견은 너무 쉽게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 중에서도 ‘비[非] 남성’에 속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여성과 같은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은 남성적인 확장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공적 영역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본다면, 공적 영역에서의 성공을 누리지 못한 대부분의 남성들을 ‘비 남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사회에서, ‘비 남성’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엉뚱한 양상으로 자신의 남성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스스로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인 가정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가정폭력을 저지르거나,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자신보다 더욱 약한 ‘비성’ 혹은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들의 폭력이 나타나는 이유를 남성이 되지 못한 ‘부끄러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김병오, 부끄러움과 가정폭력, 학지사, 2009 참고), 우리 사회가 ‘남성되기’를 강요 혹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태되는 것은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부족한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만약 그런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하소연한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라는 대답만을 돌려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하늘은 고사하고, 우리 주권의 대리인들에게도 쉽게 닿지 않는다.
‘남性’을 추구하는 우리
소수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이미 여성으로 태어났거나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비 남성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남성적인 경쟁구도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性되기’라고 말할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타성에 젖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는 현재 우리 상황에서 볼 때, 다른 사람의 삶을 잘 파악하고 모방할 때 내 삶의 위태로움이 줄어든다는 뜻으로 보인다. 가치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받아들여지거나, 성공을 거머쥐는 개성은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 정말 나만의 관심사를 가지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위태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 살 수 있을까.
이를테면, 개인방송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전혀 접하지 못한, 오직 나만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선택하는 경우는 어떤가. 개인방송의 목적이 사실상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나만 좋아하는 콘텐츠를 선택하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콘텐츠를 환영하는 그곳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익숙한 류[類]의 콘텐츠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먹방’일 수도 있고, ASMR일 수도 있다. 이 익숙한 카테고리 속에서 다른 개인방송과 차이를 만들어 내야 하지만, 그것 역시 나만의 관심사여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그곳에서, 다양성을 찾아볼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을 좇아 검증된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이미 그 사업의 과포화 상태이기 때문에 성공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주식투자도, 비트코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性’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느 집단이 유지하고 있는 동일성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양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는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대부분 개인에게 돌리고 있고,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다수의 삶이 혼란스러워지지 않도록 구조변경은 최소화하려고 할 뿐이다. 그렇게 고착화된 구조 속에서 ‘남性’이 아닌 ‘나의 속성(予性)’을 찾는 일은 요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