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bout THINGs

컵라면

by 정선생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다고 하면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이 배고픈 청년들의 대표적인 끼니가 되었지만, 그조차도 가격 차이가 있어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은 결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간식이자 미식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공간 하나 없던 시간강사 신분일 때는 점심을 먹지 않고 일했다. 혼자 밥을 먹지 못하는 탓에 가끔 같이 먹을 동료가 있으면 모를까 웬만해서는 밥을 먹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을 끼고 오전과 오후에 강의가 있는 날이면, 그냥 차 안에서 잠깐 쉬거나 도서관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금도 종종 자동차 안에서 공강 시간을 보내는 강사들을 목격한다. 물론 계약직에 불과하지만, 일정 기간은 개인 공간을 얻었으므로 괜한 측은함과 우월함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들이 불쾌하게 생각할 게 뻔하다.


매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아내는 용돈을 챙겨주고 끼니를 신경 써 주려고 하지만, 한사코 컵라면만 챙겨달라고 했다. 그것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챙겨달라고 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 사서 먹는 어떤 음식이든 몸에 좋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컵라면이 다른 음식보다 몸에 안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환경에는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환경보호라는 윤리적 강령도 생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서민들에게는 당장 와닿지 않는다. 환경보호를 위해 철저하게 분리수거를 해서 내놓지만, 업자들은 그것을 수거하지 않는다. 용기가 깨끗하지 않단다. 오염된 용기를 세척해서 재가공하는 데에는 너무 많은 돈이 든다. 재활용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도 환경보다는 생활에 신경 쓴다. 그러니, 나로서는 할 도리를 다했다. 따라서 컵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서민으로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타협 없는 남편에게 아내는 다양한 컵라면을 챙겨줌으로써, 집에서 푸짐하게 식탁을 차림으로써 소심한 저항(?)을 한다.


물론 컵라면을 먹는 이유에는 나의 홑벌이가 시원찮아 미안한 탓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컵라면 자체가 나에게 낭만인 탓도 크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임교수나 교직원처럼 공강 시간에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우르르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나도 그런 무리를 이루는 사람 중 하나였음을 기억하면서, 그러나 나는 무리의 중심이 될 수 없음에 좌절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회의 안건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교수사회의 공고한 벽, 과시로 보일 수도 있을 듯싶다.



홀로 노트북에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켜 놓고, 혹은 잠깐 짬을 내어 게임을 하면서 먹는 컵라면은 왠지 모르게 용기를 북돋는다. 치졸한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를 이 행위의 바탕에는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졸렬한 자의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 가서 교수라는 직함으로 소개를 하면(혹은 소개되면), 그들은 나를 부족함 없는 인간으로 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껏 2년 계약으로 한 달에 190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객원교수(비전임 교원)일 뿐이다. 이 어정쩡한 포지션. 그럴듯함과 실체적 빈곤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하려는 듯하다. 그게 더 나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이 학교에 없는 한 스승의 말이 생각난다. “야, 이제 제발 그렇게 굽실거리지 마. 너도 이제 박사학위 받은 당당한 연구자야. 할 말 있으면 하고, 의견을 내세우고 하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스승의 말이야말로, 내가 아는 한 가장 형식이었으니까. 유리천장에 머리를 박고 추락하라고 부추기는 듯한 말처럼 들렸으니까 말이다.


이제 글을 다 썼다. 컵라면에 물을 부은 지 20분 남짓 지났다. 불대로 분 면발은 목 넘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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