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방어진 해녀」

우리 모두의'멍기',혹은 '멍이 든 이름'

by 정선생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레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실성한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 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며 갓 따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우리가 보통 ‘해녀’ 하면 ‘제주도’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울산에도 해녀가 있고, 여전히 물질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0년에 울산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고요, 작년(2020년) 8월 말에는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울산광역시 편에서 ‘대왕암 해녀촌’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짐작건대 「방어진 해녀」라는 시는, 손택수 시인이 2000년대 초반에 ‘해녀노천포차’ 같은 곳에 들렀던 경험을 소재로 다룬 시로 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시에 묘사된 풍경이 낯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이 멍게를 주문하자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주인을 보고, “하마터면 실성한 여잔가” 싶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짐작이 가는데요. 아마 시인은 이 바닷가 포차가 해녀를 통해 ‘실시간’으로 해산물을 조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이 시의 또 다른 매력은 ‘멍기’라는 사투리를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방언은 자신이 경험한 독특한 모습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방언을 시어로 사용하면 토속적인 느낌을 많이 느낄 수 있는데요, 손택수 시인도 ‘멍기’라는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방어진 몽돌 해변에 있는 음식점의 이색적인 분위기를 보다 정답게 그리는 듯합니다.

시인은 해녀의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며 갓 따올린 멍게로 보이 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듣는 분에 따라서는 다소 불쾌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성인 시인’이 ‘여성인 해녀’를 두고 육감적인 이미지만을 포착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마도 시의 주인공에게는 ‘그리운 여인’이 있는 듯합니다. 헤엄쳐 나오는 해녀를 보면서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를 소리쳐 부르고 싶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운 이를 가슴에 품은 사람에게는 ‘텅 빈 바다’를 향해 ‘멍게’를 외치자 해녀가 멍게를 들고 나오는 상황이 신기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가슴 깊이 묻어둔 그리운 사람을 소리쳐 부르면 당장에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는 기대감을 품을 수도 있겠고요. 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어떤 사람을 향한 열망이 있고, 그래서 해녀를 두고도 육감적인 모습을 포착한 듯합니다.

멍기라는 시어와 멍이 든 이름이라는 구절은 요즘 유행하는 힙합의 라임처럼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멍게’라는 친숙한 존재라고 했다가, ‘멍기’라는 존재로 보인다고 고쳐서 말하는 듯합니다.


바다는 지구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울산의 바다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고장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고래와 함께한 선사시대 역사와 임진왜란의 아픔,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룩한 영광의 시간과 코로나로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지금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사냥’이나 ‘전쟁’, 그리고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영역에서는 ‘여성’이 소외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앞에서 시의 내용을 살필 때에도 ‘해녀’는 육감적인 이미지,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녀가 물질을 하는 이유, 그들의 삶에 존재하는 아픔 같은 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드러내지는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방어진은 본래 ‘고려’ 때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공간(防禦津)’, 조선시대에는 방어가 많이 잡히는 나루터(魴魚津)라는 의미로 불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어업 전진기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현재의 방어진(方魚津)으로 바뀐 것도 일제강점기가 유력하다고 해요. 이후 울산의 산업화 발전 속에서 방어진에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공업을 중심으로 발전을 도모하는 와중에 어업 종사자분들의 삶은 그만큼 소외될 수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해녀는 그중에서도 더욱 객체화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고요.

물론, 해녀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울산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시인의 마음에 자리 잡은 ‘멍이 든 이름’이 2000년대 초반, 공업도시 울산에서 소외되어 있던 존재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지금은 울산의 소중한 동반자가 된 자연과 문화와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해녀’로 대표되는 여성의 삶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6월 3일 방송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때 최성훈 교수께서 ‘스킨다이버’는 해녀의 잠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녀들이 호흡을 연습하고, 실제로 물질을 하면서 호흡을 견디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해녀의 물질이 사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거는 역설’, 말 그대로 극한 직업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파도는 어루만지기보다 거칠게 때립니다. 아낙이 몽돌처럼 둥실둥실해진 것은 거친 파도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적응한 모습이겠습니다. ‘물질하는 해녀’와 ‘뭍에 선 아낙’은 거친 파도와 같은 삶에 맞서 살아가는,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여성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해녀’를 통해 자신의 그리움을 내비친 서정시를 너무 진지하게 읽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문득 시집을 펼쳐 들거나, 바다를 찾아가는 이유는 단순히 표현을 즐기거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손택수 시인이 헤엄쳐 나오는 해녀를 보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멍이 든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주도 나만의 의미를 불러보는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6월 14일 울산 KBS 라디오, <라디오 세상 울산 만사>에서 방송한 내용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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