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의 「강동 양조장에서」

숙성의 공간에서 느끼는 오래됨의 의미

by 정선생
낡은 외투는 가난의 상징이 아니었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남은 그 시절 이야기였다
돌이켜 보면 쓸쓸한 것들이
지금의 충만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닳아 없어진다는 것은 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다
하여 새 살 돋듯이 새삼 그리움의 밀물이 되어 다시 내게로 오는 것이다
버리는 것에 익숙한 나날들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 아득함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창고 한 켠에 켜켜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제가 이 시를 읽은 건 2013년 가을 즈음이었습니다. 그때도 ‘강동 양조장’을 찾아보려고 했는데요, 아쉽게도 저는 ‘강동 양조장’이라는 곳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정자 양조장’이라는 곳을 찾았었는데요. 그곳도 제법 오래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양조장을 보면서 이 시에서 시인이 느꼈던 것을 공감해 보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정자 양조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해 드렸던 시에 나온 ‘언양읍성’, ‘서생포성’ 같은 장소도 그렇듯이, 아무래도 오래된 장소에 있는 낡은 건물을 보면 화려했을 당시 시절과 초라한 현재를 비교하며 ‘인생무상’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합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건물의 겉모습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이기철 시인도 자신의 ‘낡은 외투’와 ‘양조장의 오래된 모습’을 동일시하면서 뭔가 서글픈 감정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첫 구절에서 “낡은 외투는 가난의 상징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면서, ‘낡음’에서 오는 일반적인 느낌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은데, 저도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면서 ‘새 옷’을 입는 것만큼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입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낡으면 깁고, 더러워지면 세탁해서 입으면 그것이 새 옷과 다름없다는 교육 말이죠. 아무래도 지금처럼 풍족한 소비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껴 쓰는 것을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도 중고 거래 같은 것을 많이 합니다만, 지금의 중고 거래는 풍요로움 속에 버려지는 새것 같은 물건을 주로 거래하는 것 같아요.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이 너무 많은 것이죠.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낡은 물건’이 있으면, 그건 마치 새로운 물건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형편을 반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래된 물건을 쓰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탄을 자아낸다면, ‘검소해서 멋있다’라기보다는 ‘아직도 그걸 쓴다고?’라는 놀라움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래되고 낡은 물건’이 ‘가난’의 증명은 아니라는 것, 돌이켜보면 외투를 바꾸지 않은 것이 쓸쓸한 기분을 들게도 하겠지만, 그건 오히려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일이었다고 반박합니다.

실제로 겉모습에 연연하는 마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향한 집착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부’와 ‘명예’, ‘젊음’은 영원할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현재의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게 유지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잃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마저 충만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인은 낡아서 “닳아 없어지는 것”은 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것저것 “버리는 것에 익숙한 나날들”을 살아온 것도 돌이켜보면 상실하는 삶이었다기보다는 ‘마음에 새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겉모습의 소멸을 통해 마음이 충만해지고 있는 것이죠.

조금 더 쉽게 생각해 보면, 이런 것 같습니다. 사탕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죠. 사탕은 점점 닳아 없어집니다. 작아진 사탕을 보면서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사탕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미각에 스며든 것이고, 몸속에 당분으로 저장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이 처음의 빛깔을 잃거나, 사람이 점점 나이를 먹는 일은, 처음에 지니고 있던 모습이나 젊음, 능력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의 겉모습이 변해가면서 내면으로는 더 완숙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겠습니다. 흔한 말로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처럼 말이죠.

시인이 이런 깨달음을 ‘양조장’에서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양조장’은 바로 ‘숙성’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양조장은 ‘술’이나 ‘간장’, ‘식초’ 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인데요. 저에게는 술이 조금 더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웅촌에도 막걸리 양조장이 있고요.

그런데 술이 ‘맛’을 얻으려면 본래의 재료가 숙성되어야 합니다. 분해되고 뒤섞이고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원하는 맛’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술을 얻었을 때 본래의 재료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을 만들기까지의 시간조차도 허비되는 것이 아니라, 술의 맛에 스며드는 것이니까요.

지난 번에 말씀드린 어죽이나 어탕이 그러하듯, 한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숙성이라는 오랜 기다림, 그 시간 동안 그릇에 담긴 재료들은 본래의 모습이 삭아서 허물어지고 어우러져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합니다.

시인은 강동 마을에 있는 양조장에서 얻은 깨달음을 우리의 삶에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젊음을 잃어버리고, 그 시절 누리던 많은 것을 지금은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개인적인 역사로서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은 곪아 들어가는 아픔이 아니라 ‘새살’처럼 돌아옵니다. 상실의 아픔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증명이고, 숙성된 시간의 깊은 맛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의 현재를 채워주는 것이죠.

작년에 저는 도서관에서 중년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시 창작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고, 지금은 자전적 에세이 쓰기를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감히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기가 부끄러울 만큼, 그분들에게서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이 드신 분들의 지난 이야기를 단지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넋두리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기철 시인이 ‘강동 양조장에서’ 느꼈던 것처럼, 중년 분들이나 오래된 장소가 지니고 있는 의미 같은 것을 우리의 ‘새살’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울산이 더 젊어질 수 있는 ‘숙성’의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내용은 6월 7일 울산 KBS 라디오, <라디오 세상 울산만사>, "인문학 소풍, 그대와 함께" 코너에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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