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성, 「주전에서」
남편과 아내, 울산의 과거와 오늘의 화해
울산 사람들에게 주전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주전 바다’ 하면 ‘MT’가 먼저 생각난다. 대학생활 동안 학년 MT나 동아리 MT는 주전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춘천’ 만큼이나 울산의 청년들에게는 주전이 MT 장소로 인기가 있었다. 데이트나 나들이 장소로도 물론이겠다. 최일성 시인의 「주전에서」라는 시도 ‘주전 바다’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오랜만에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주전 앞바다.
살아 온 날들의 때를 벗기는
파도의 칼날 아래
우리는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늙어 가네요.
해풍에 흔들리는 아내의 얼굴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어
꿈을 짓이긴 남편의 못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서하라 아내여
어쩔 수 없어 철썩이는 파도처럼
어쩔 수 없이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오만을
용서하라 아내여.
여름에 바다가 매달리는데
부끄러운 삶 한 부분을
모래톱이 잘라내는
주전 앞바다.
시인은 주전 바다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부부로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있다. 시인의 눈에는 ‘하늘’과 ‘아내의 얼굴’이 동시에 들어오는데, 귓가에 들리는 ‘파도’ 소리가 부부로서 함께한 세월의 ‘해묵은 때’를 씻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파도의 칼날 아래’라는 표현이다. 사실 이런 표현은 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해석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흔히 ‘경상도 사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남자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런 남자가 ‘부부 사이’의 묵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주전 바다에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으니 굳이 자신이 시도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음이 풀어지면서 서로 간에 존재했던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다고 할까?
‘경상도 사나이’가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충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말 자체가 중년 세대에게나 통할 법한 말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의지하는 남편의 모습, 아내에게 여린 모습을 보이는 남편의 모습이 어쩐지 부끄럽다는 고정관념처럼 말이다.
사실 1연에서 보인 이런 태도 자체가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뒷받침한다. 시인은 늙어버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내의 꿈을 짓이겼음을 용서하라고 한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온 탓에 아내를 위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변명을 하는 듯하다.
그에 비해 아내는 그러한 남편임에도 자신의 무릎을 내어주고 있다. 허영미 시인의 「바다에 살다」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파도와 같은 남편에 의해 오랜 세월 다듬어진 몽돌처럼 둥근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남편의 얼굴을, 아무런 원망 없이 내려다보는 푸근한 존재로 보인다. 그런 모습에 남편이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에서 아내의 진심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아무래도 남성 시인, 남성화자가 말하는 아내의 모습이란 여성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테니 말이다.
오히려 「주전에서」라는 시는 한 남자와 여자의 개인적인 사연일 수도 있지만, 공업도시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공업도시 울산은 ‘경상도 사나이’ 같은 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업화 이전의 울산은 한적한 어촌이자 농촌이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아내’처럼, 울산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속성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도시’, ‘생태도시’라는 울산의 지향점은 어쩌면 이기적으로 아내를 이끌고 살아왔던 자신을 반성하는 ‘남편’에 의해 비로소 인정받은 ‘아내’의 ‘짓이긴 꿈’인지도 모르겠다. ‘주전 바다’에서 ‘부부의 화해’ 가능성이 엿보인 것처럼, 울산은 공업도시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생태·문화도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랜 부부가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읽으면서 공감해도 좋고, 상상력을 더 발휘해서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시에 등장하는 부부처럼,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즐기며 서로의 얼굴을 마스크 없이 온전히,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울산 KBS 제1라디오, <라디오 세상, 울산만사>에서 3월 29일 방송한 "인문학 소풍 그대와 함께"의 내용을 다듬은 것입니다.